육군중위 이순신

32살에야 소위에 임관했다.

by 서애가

이순신은 육군이었다.


조선시대인 1580년대에는

육군이나 해군에 대한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이순신은 초임장교로 러시아와 중국의 경계에 맞닿은

함경도 제일 끝지역인녹둔도의 경계를 지키던 부대의 지휘관이었다.지금으로 치면 약 42살의 나이에

중위정도의 계급으로 이렇다 할 특별함 없이 진급은 많이 늦은 평범한 군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

녹둔도의 형국이 중국국경과 맞닿아 있다 보니 소규모 전쟁이 종종 있었고 이순신은 상관 이일에게 병사를 늘려달라는 요청을 지속적으로 하게 된다. 세종시절 만들어진 최소한의 병력으로 유지되는 제승방략 진관체제의 기준하에 군이 유지되는 시절이었기에 이순신의 요청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대규모 군부대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그 시대에는 평소에는 최소의 인원으로 국경을 지키다가

전쟁의 상황이 되면 주둔군이 적을 막는 사이에 중앙의 중앙군이 전투에 합류되는 체제를 유지했고 실질적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가장 저렴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대규모침공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이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

1587년 가을..

1000여 명의 여진족이 추수하는 기일에 맞춰 야음을 틈타 녹둔도 본진을 쳤다. 녹둔도를 지키는 아군은 겨우 몇십이었다. 이들 중에서도 1개 소대는 지휘관과 함께

추수를 위한 대민지원으로 외출 중이었다.


1개 중대와 1개 사단의 전투.

그것도 여진이 미리 치밀하게 준비했던 전투였다.


조선군은 11명이 전사하고

백성 160여 명이 포로로 납치되었으며 15필의 말도 약탈당하였다. 복귀한 이순신은 바로 상황을 파악하여 군세를 정비하여 여진족을 쫓아가 겨우 몇십의 기병으로 적장 3명을 죽이고 백성 160여 명을 구하게 된다.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조산만호 이순신과 경흥부사 이경록을 잡아가두고 조정에 장계를 보내 이순신과 이경록을 군율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보고하였다. 조정은 바로 판단을 내리지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모든 책임이 이들에게 있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을 뒤집은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유명한 "선조"였다.

1587년 10월 16일 선조는 한 번의 실수로 사형은 과하니,

북병사 이일에게 이순신과 이경록 두 사람에게 장형을 집행하고 백의종군을 하게 하여 입공자속할 기회를 주라고 권고하였다.


두사람은 살게되었다.


이경록은 인고의 세월을 거쳐 임진왜란 즈음부터 제주목사로 임명되고 임진왜란기간 동안 이순신 수군의 식량과 가축등 전쟁물자를 지원하였다.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의 휘하에서 종군하다가

1588년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여진족장수 우을기내를 잡은 공으로 사면되어 복권되었다.이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이라는 하급장교를 조정에 각인시키는 전투가 된다.


불과 3년 후인 1591년 2월...하급장교였던 이순신은 7개급을 뛰어넘고 승진되어_지금으로 치면 중위에서 대령정도..해군의 전라좌수사로 근무하며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군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조정의 모든 반대를 뛰어넘고 선조가 강행한 인사였다.


1592년 5월(음력 4월)..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좌수영의 모든 반대를 뛰어넘고 완성시킨 귀선.

그 귀선(거북선)이 시범운항을 완료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keyword
이전 09화승압(昇壓) 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