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작은 나라이다.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현판을 달아 놓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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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교만할 수가 있는가.. 안하무인(眼下無人)이며 오만함의 극치였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제일로 알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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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가 영조의 딸이었고 뼈대 있는 양반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였다.
어릴 적부터 문장이 뛰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그에 맞는 교육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건 무엇이든 먹을 수 있었고.. 갖고 싶은 것 또한 무엇이든 취할 수 있었으며 20대 초반에는 아버지가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탐방 시 자제군관자격으로 동행하여 지평을 넓힐 기회도 얻는다. 물론 그가 좋은 머리와 노력을 겸비하였기에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최고 수준의 고증학의 진수를 접하고 공부할 수 있었다. 후에 연경제일의 원로이자 중국제일의 금석학자 옹방강은 그의 놀라운 학문에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칭하였고 학자 완원은 그에게 그의 이름과 비슷하게 완당이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제자로 삼았다.
"나는 중국을 심히 사모한다. 조선에는 사귈만한 친구가 없다."
"내 낳은 곳은 미개한 땅,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럼이 있네"
조선을 아래로보고 중국을 위로 보는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었고 국내 학자들에게 많은 미움을 샀다.
조선후기 양반남성의 평균수명인 53세가 넘어서도 그는 그런 삶을 살았다.
평생을 그리 살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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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그의 인생철학을 뒤집는 사건이 있었으니.. 군신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윤상도의 옥사사건에 연루된 그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든든한 집안의 장손인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귀양이 풀릴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귀양 온 지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항상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떠들썩하였고 그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그였으나..
긴 귀양살이에는 그도 별수 없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듯하네."
막내아들 김상희에게 보내는 편지에 절망적인 심정을 나타내었다.
제주도에 내쳐진 그는 귀양살이의 고독에서 오는 외로움, 억울함과 부잣집 도련님으로만 살던 그의 입맛은 귀양살이 풀칠만 할 수 있는 먹을 것이 입에 맞지 않았고 제주도로 불어오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오직 글씨를 쓰는 것.. 그것뿐이었다.
글씨를 쓰고 또 썼다.
벼루가 열개가 구멍이 나고 붓이 천필이 부러질 때까지..
귀양살이에서 오는 무료함에 진저리 쳐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수 없는 날을 보내며 글씨를 썼을 때에야 이르러서 그는 중국에서 배운 느끼하고 기름진 그의 글씨는 점차 사라지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씨가 완성되었다.
그것이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철학적으로 거듭난 김정희의 삶의 정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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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자 우선 이상적.
스승인 김정희가 유배를 가서 현실의 권력을 모두 잃었을 때에도 스승이었던 김정희를 배신하지 않고 변함없이 중국에 갈 때면 스승이 좋아했던 중국의 신간서적을 구입하여 보내주고 스승의 건강을 챙기던 그였다. 9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변함이 없었고 김정희의 예술은 이 시기를 맞아 완성을 해나갈 수 있었다. 김정희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제자 이상적에게 그 고마움을.. 자신의 완성된 예술세계의 결정체인 "세한도"를 그려 선물한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歳寒然後知松柏之後凋"
날이 차가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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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인.. 1849년 4월 약 9년의 시간이 지나고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생활에서 풀려난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길 추사는 대흥사에 들른다.
"여보게 초의(초의선사, 동갑내기친구 장의순), 이 현판을 다시 달고 내 글씨를 떼어내게.. 전에는 내가 잘못 보았네."
그리고 전라도의 이삼만을 찾아 그의 글씨를 천하게 말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9년이라는 제주도의 귀양살이는 김정희의 교만이 겸손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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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조정에 진출하지 아니하고 제자양성에 집중되는 삶을 살던 그는..
1856년 10월 8일.
봉은사에 새로 조성한 건물현판에
"판전:71 세과병중작(71세에 과천에서 병든 상태로 쓰다)"을 써준다.
3일 후인
1856년 10월 10일.
조선후기의 최고의 예술가이자 학자였던 추사 김정희는 71세를 일기로 생을 내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