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나라 만들기

24시간이 모자란 지금의 행정부를 보며...

by 서애가

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서광범·홍영식 등 개화당파들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일종의 쿠데타 사건 민씨 정권의 청나라 내통으로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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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에 연관된 자들은 연좌제로 집안대부분의 재산이 국고로 환수되고 가족친지들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로서 남은 생을 살게 되었다. 살아남은 개혁당의 막내 서재필은 20세였던 그해 미국으로 건너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18세에 과거를 급제하였던 천재적인 머리를 활용하여 빠른 시간에 언어의 장벽을 넘고 대학졸업 및 석사까지 취득하여 컬럼비아 의과대학에 강사로 출강까지 하게 된다. 그 시대 인종차별을 생각한다면 오로지 능력으로만 그 자리까지 오른 그였다. 그렇지만 김옥균

중국에서 암살된 후 조선에 환국되어 그시신을 능지처사한 소식은 자신도 언제든지 암살될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조선

에대한 분노속에 조선이란 나라를 불신하며 살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개혁당 대부분이 복권되고 그 역시 포함되었지만..

그는 그의 가족을 멸족시키고 자신을 암살의 불안함 속에 살게 했던 조선을 경멸했다. 미국에서 만난 정치적 동반자 박영효의 조선이 바뀌었다는 설득으로 조선을 개혁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조선에 귀환하였으나 그는 철저한 미국사람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이름을 쓰지 않았고 조선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1896년 고종과의 독대에서도 그는 절하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정치적 동반자였던 박영효 역시 경악했다. 서재필은 고종을 왕으로 대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계몽하고자 그는 정치력을 동원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지방자치제도를 주장했고, 독립협회 활동 및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다. 미국의 노예해방을 보고 온 그였기에 노비해방운동을 추진했고,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인권에 대해 백성들에게 교육했다. 모두가 배워야 한다는 보편교육론을 펼치고 거기에 의회를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기존 기득권세력에게 온갖 미움을 받게 되고 결국 조선에서 쫓겨나게 된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디머 앤 제이손 상회를 설립하고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후 을사늑약이 진행되었고 1918년 미국에서 안창호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오늘날 조선의 백성은 승전국 일본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을 보전하고 있소. 그럼에도 아직 누구 하나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일본의 학대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려는 자가 없소. 그러니 바깥 세계에서 조선인을 위해 불쌍하다며 동정을 표하는 자가 없는 것이오."라는 것이 그의 입장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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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개혁)의 실패 이후.. 그에게 조국은 없었다. 그는 조선은 구제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몸담았던 개혁인사들을 집안까지 제거하고 척신들로 정부를 채웠으며 내부부터 부패한 이상 어쩔 수 없다는 현실을 인지했고. 더구나 왕족들이 일본이 주는 작위를 받고 합방 은사금을 받았다는 사실은 조선에 대해 실망하고 더욱 한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그냥... 조선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한때 조선인이었던 미국인으로 살게 되었다. 그에게 조국과 민족은 없었다. 출신이 양반이었지만 썩어버린 지도층만 남아있는 지금의 조선은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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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토록 경멸했던 조선의 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는 조선을 단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그라들것 같던 조선백성이 일본의 무력에 맞서 일어섰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된다.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 독립만세운동. 그 속에는 양반이 아닌 그가 그토록 노력했었던 교육으로 계몽된 백성들이 있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자신이 체포되거나 죽을 것을 알고 만세 시위에 뛰어든 학생들, 기밀을 누설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손목에 칼을 그은 학생들의 의거소식을 접한 그는 깊이 감동한다. 지도층의 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깨어남과 그에 따른 조직적인 생동감.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한민족에 대해 다시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후 그는 신에게 선물 받은 그 천재적인 머리를 한민족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그가 기업가로서 그동안 이루었던 모든 부를 독립운동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1920년 한국통신부 코리아 리뷰잡지를 발간하여

미국에서 일본이 벌이고 있던 조직적 선전활동에 대항하고

미국의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보내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을

준수하라고 요구하였다.

1921년 워싱턴 군축회의에 나가 일본의 탄압을 호소하였고

1922년 조선독립서한을 들고 워런하딩미국대통령을 찾아갔으나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만남을 거부당하고

1924년 개인재산을 많이 지출함으로 법적인 파산을 맞게 된다.

1925년 범태평양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규탄하고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고

1926년 생활비와 빛에 쪼들려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을 겨우 납부하는 수준이 되자

다시 생계에 뛰어들게 된다.

1930년 그는 다시 공부를 하여 병리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한국인최초 미국인

의사가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후에도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으며 1951년 사망하기 전까지 한국의 독립 후 행정부의 기초를 다지는데 그의 삶을 헌신하였다. “한국 민족은 훌륭한 민족이다. 그들은 영리하고 건강하며 생산적이다. 수세기 동안 시련과 고난에 시달려 왔지만 여전히 고유한 민족 문화를 갖고 있으며, 세계 속에서 더 높고 고귀한 지위를 획득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한국 민족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삶의 조건을 향상하기 위한 열망을 결집하는 것이며, 정치적·경제적·개인적 자유를 위한 열정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면 더 많은 나라들이 한국 민족의 장점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재필, 1939년 12월 7일

1945년 결국 조선은 독립하였고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정부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한민족의 계몽이야말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개혁당이 하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노령의 나이가 된 그는 한민족으로 통일된 하나의 온전한 정부를 바랬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을 인정하고 그의 제자 뻘인 이승만에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직을 맡기고 한 많은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청나라의 내정에서 독립하여 단단한 나라를 만들고자 갑신정변에 뛰어들었던 당시 스므살 막내였던 서재필은.. 1951년 미국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안타까워하며 88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망하기 전 노구였던 몸을 뉘우 침실에서 젊음을 함께했던 선배와 동지들을 생각하며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을까..


"김옥균선생님.. 그리고 선배님들.. 저.. 이 정도면 선배님들 뜻에 맞게 잘살았지요?"


갑신정변 직전 촬영된 개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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