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_이 혼(생.1575~(재위1608~1623)~졸.1641_55세)
1. 광해군_이 혼(생. 1575~(재위 1608~1623)~졸. 1641_55세)
2. 내가 느낀 그의 성격 : ESTJ_2. 동일한 성격의 조선왕 8대 예종
현실적, 구체적, 사실적이다.
또한 어떠한 활동을 조직화하고 주도해 나가는 지도력과 추진력이 있다.
행정, 의료, 법조, 군대, 경찰, 재무 등 '조직관리'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타고난 지도자로서 프로젝트의 목표를 설정하고, 지시하고, 결정하고, 독려하여
기한 내에 철저히 이행하는 능력이 있다.
불확실한 미래의 가능성보다 흔들리지 않는 현재의 사실을 추구한다.
하지만 감정을 고려하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 중심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타인의 감정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건강한 ESTJ는 타인을 지적하기보다는 성격과 능력치를 상식적, 논리적으로 고려하여
업무를 배분한다.
할당된 업무가 개인의 능력치를 넘는다 판단될 경우 자기가 일 처리를 다 해버린 후,
그 사람을 좌천시키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겉보기 특성 - 리더십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돈을 잘 버는 유형이다.
카리스마 있는 선배, 교육자, 상사, 사장, 가부장적인 부모 등의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엄격, 엄숙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냉정한 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을 물질적인 부분에서 알뜰하게 챙기는 모습도 보여준다.
직장에서 전형적인 구세대의 꼰대 이미지인데, 윗사람한테는 매우 깍듯하지만 특유의 보수적인 성향으로
부하들에게는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평가가 나쁘다.
공격적이고 편협한 성향으로 온갖 갈등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근면성실하고 현실적이며 꼼꼼하다.
그래서 사실상 위계질서와 서열, 역할이 분명하게 구분된 전형적인
사무직이나 현장직 등에서는 빛을 발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나 모든 유형 중에서 J성향이 가장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따라서 이전에 해오던 방식에 문제가 생겨도 점진적으로 개선하기보다 고수하려는 모습이 강하며,
기존 계획에서 기준이나 절차, 형식 등이 조금만 달라져도 불편해한다._출처 나무위키
3.ESTJ의 성경인물-노아
4.ESTJ의 유명인
남 : 홍준표, 황교안, 김문수, 조규성, 김구라, 데프콘.. 등
여 : 김남주, 이은지, 이지혜, 한가인, 한채영.. 등
5. 그의 삶에 결정적인 사건 : 선조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壬辰倭亂)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전국 시대가 끝난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가 소멸했다.
6. 그의 삶을 함께한 사람들 : 율곡이이, 퇴계이황, 유성룡, 오성과 한음, 이순신, 허준, 이경록, 신립, 원균,
곽재우, 권율, 김덕령, 이산해, 정여립, 정철, 조헌, 고경명 등
7. 그의 가장 큰 업적_대동법과 실리외교 그리고 문화사업
1608년 선혜청을 설치했고, 경기도 일원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간의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다.
대동법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공물을 백성들에게 현물 대신 쌀로 받아들이는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리고 1611년 양전사업을 통해 경작지를 넓히고 국가재원을 확충하였다.
<신 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이 간행되었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의 편찬되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같은 책들이 저술되었다.
명나라는 1618년 윤 4월 27일, 병부좌시랑 왕가수의 격문을 보내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해 명군이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병을 거부했지만, 이이첨을 비롯한 비변사 신료들은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파병을 적극 주청했다. 그 무렵 광해군은 폐모 논의와 궁궐 건설 등 내정의 현안들로 골치 아픈 상태였으므로 거듭된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주청이 이어지자 어쩔 수 없이 파병을 수락하고 말았다.
1619년(광해군 11년) 2월, 1만 5천 명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선양 부근의 사르후 지역으로 출동했다.
이 원정을 심하전역(深河戰役) 혹은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광해군은 당시 명군이 동북 오지인 허투 알라까지 장거리 원정을 나선 것을 알고 피로에 지친 명군 지휘부가
조선군을 적극 활용하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억울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상황을 직시한 광해군은 어전통사 출신의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한 다음 명군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패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강홍립은 추후 후금군에게 항복하여 많은 목숨을 살리게 되었으나 조정은 이를 직무유기로 판단하여 그의 가족들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후금에게 죽임을 당한 선천군수 김응하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고 조선군이 치열하게 후군과 싸웠고 항복한 것으로 선전하여 조선과 명나라의 조정을 달랬다.
8. 그의 가장 큰 실수
- 칠서의 옥사건과 미신
1612년 일어난 이 사건은 당시 조정에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해 달라며 명나라에 사람을 보내 제차책봉과정을 재심해 달라 요청하였고 당연히 역모가 되어 100여 명이 죽고 처형된 사건이다.
영창대군은 광해군에게 역린이었다. 선조가 광해군을 끝까지 다음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영창의 존재 때문이었고 왕이 된 후에도 정통성의 약점이 있던 광해에게 영창대군의 존재는 엄청난 부담이었다.
결국 7살 영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시대의 희생양으로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어 상식없는 어른들의
행동으로 겨우8살의 나이에 몇일을 굶다가 결국 방에 갇혀 뜨거운 열기에 찌어져 죽게 된다.
강화부사 정항이 몰래 밥주는 자를 잡아다가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있으니 겨우 8살 아이를 몇일을 굶겨서 일어설 힘이 없는 상태에서 군불을 때서 뜨가운방에 쪄 죽인 명백한 살인사건이다.
하물며...
임진왜란때 얻은 공덕을 이 사건을 통해 모두 잃게 된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인조반정의 뼈대가 되는 명분이었다.
이후에 끝없는 피해의식 속에 살다가 미신에 빠지게 되며
미신의 의견에 따라 나라재정을 쏟아붓는 궁 짓기에 몰입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1649년 사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