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몫
독서 모임 커뮤니티에서 책과 영화를 함께 보는 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책과 영화를 주제별로 페어링 해서 4개월마다 함께할 사람들을 모으고 매달 한 번씩 만나 대화한다. 자기소개, 근황 토크부터 시작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3시간이 30분 같이 지나간다. 그냥 한 명의 참여자일 때와는 다르게 모더레이터는 할 일이 많다. 여럿 중 하나로 앉아 있으면 못 알아듣겠어도 알아들은 척 끄덕끄덕 넘어갈 수 있지만 모더레이터는 모호한 말에 갸우뚱하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고 누군가 서툴게 꺼낸 말의 뜻을 최대한 찾아내어 한번 더 정리를 해줄 의무가 있다. 그러니 우선 최선을 다해 들어야 한다. 서로 다른 말을 꺼낼 때 저이는 이런 말을 하고 싶고 저이는 저 말을 하고 싶구나. 맥락을 파악해서 그것이 결국 같은 말이라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돕는다. 대립되는 의견이라면 각자가 왜 그리 생각했는지 더 들어볼 수 있게 한다. 물론 열다섯 명이 함께하는 대화를 나 혼자 다 정리하고 질문하는 건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다만 서로서로 묻지 못하고 대화의 끈이 옅어질 때 겨우 연결되고 있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준다.
처음 클럽을 만들고 한동안은 모임이 땀나게 힘들었다. 나도 사람들이 낯설고 어색한데 살갑게 말을 걸고 대화에 참여시키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지독한 성격이라 참여를 잘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숙제를 못 끝낸 것처럼 초조했다. 대화 사이에 공백이 빼꼼 생기면 발언량이 거의 없던 사람에게 누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었다. 그러면 열에 아홉은 오 질문이 뭐였죠. 아 제가 듣느라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요. 당황을 해서 모두가 머쓱해지곤 했다. 그냥 훅 찌르듯이 마이크를 들이민다고 의견을 꺼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끝나고 집 방향이 같은 멤버 분과 가는데 그분이 그랬다. 말을 꼭 하지 않아도 듣고만 있어도 좋다고. 평소에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말하는 사람인데 여기서는 듣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아 신나게 말하는 사람만 대화에 참여하는 건 아니구나 듣는 사람도 다 대화 안에 있구나 깨달았다. 내가 볼 수 없는 각자의 속내에 이 대화가 쑥 들어가서 팡팡 불꽃놀이를 일으키고 있을 수도 있고 공감의 담요가 되어 포근한 상태일 수도 있다.
듣는 것이 편안한 얼굴과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머뭇대는 얼굴은 다르다. 계속하다 보니까 그런 게 보였다. 또 아무리 듣는 게 좋다고 해서 듣고만 가는 건 아쉬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말을 꺼내기 어색해서 안 하다 보면 스스로 할 말이 없다고 믿게 되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생각을 꺼낼 수 있게 돕고 싶었다. 모임에 나오려면 제출해야 하는 독후감이 있는데 거기에 이미 영화와 책에 대한 생각이 적혀 있으니 모임에 가기 전에 모든 멤버들이 쓴 글을 열심히 읽어 보았다. 서로 비슷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누군가 고민이라고 한 부분을 또 다른 이가 해답을 정리해 둔 경우도 많았다. 다 함께 모여서 천천히 발제문을 따라가다 보면 꼭 누군가의 독후감에 닿는다. 그때 머릿속에 그 누군가 쓴 글귀가 번쩍 빛이 켜지고, 누구님 글에 이렇게 쓰셨는데 더 이야기해 주실 수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덜 당황스럽게 말이 나온다.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먼저 보는 경우엔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가 바로바로 안 떠올라서 새 멤버들은 이름과 핵심 포인트를 메모해 가기도 했다.
처음엔 맡은 역할을 잘하고 싶어서 사람들의 글을 읽고 귀를 기울였다면 점점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로 느껴졌다. 내가 고른 영화와 책을 두고 이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단 말이야. 사람들 생각이 하나도 같지 않은데 보편적인 공감대는 꼭 존재하네 특이하다. 무엇이 같고 다른지 찾다가 머리가 트이는 아하 모먼트가 한 번씩 찾아온다. 매번 있는 시간 없는 시간을 쪼개 과제하듯 준비하느라 괴롭지만 사람을 이해하면서 작품까지 이해하는 게 좋았다. 멤버들도 아무도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글을 기억하고 질문하는 게 고마운지 점점 서로의 글을 먼저 읽고 나오고 모임에 마음을 붙여갔다.
누가 말을 안 해도 걱정이지만 말을 너무 많이 해도 당황스럽다. 신나게 말하는 사람을 막을 수도 없고 지루해하는 다른 이들도 눈에 훤히 보이니 말이다. 한 번은 몇몇 분들이 누구님은 말을 참 길게 해요. 좀 잘라주셔야 하는 거 아닐까요. 장난스레 불평 아닌 불평을 던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답했다. 저도 길게 말씀하실 때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제가 말을 자르거나 정돈되게 말하라는 눈치를 주면 다른 분들도 말하기 불편해지지 않을까요? 너무 긴 것 같으면 제가 자연스럽게 정리해 볼게요. 눈꼬리를 한껏 내리고 한 번만 봐주란 식으로 말했다. 모임에서 운영자가 누굴 제지하는 일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닐 수 있다. 자칫 모두에게 규칙처럼 전해질 수 있어 조심스럽다. 여기선 길게 말하면 안 되나 봐 사람들이 지루한가 봐 겁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내가 그가 하는 말을 더 빨리 알아듣고 공감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 멤버 분은 서툴게 생각을 꺼내느라 말이 길어질 때도 있지만 언제나 자기만에 인사이트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끝까지 들으면 마음에 쿵 뭔가 전해지곤 한다. 멤버들도 결국엔 그의 캐릭터를 파악하고 그가 천천히 말하는 것을 기다려주고 기대했다. 나도 더 능청스럽게 말을 줄이는 스킬이 생기기도 했고 말이다.
어디 가서 우리가 누군가의 말을 끈기 있게 듣겠는가 생각한다. 어디선가는 천천히 말할 기회도 주어져야 한다. 너무 큰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최대한 빨리 핵심만 말해야 하는 회사 생활과 1초 안에 후킹 하지 않으면 시선도 가지 않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느긋하게 이해하려고 시간을 쓰는 것도 연습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부터 듣는다. 성질 급하게 남의 말을 끊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조금만 더 듣는 것을 연습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지루해서 못 견딘다면 그건 그의 몫이다. 내가 잘못해서도 말하는 이가 느려서도 아니다.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이해할 거다. 책임감만큼 통제 욕구도 강한 나는 이 모임을 2년 동안 운영하면서 상황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두는 법도 많이 배웠다. 내 감정은 내 몫인 것처럼 어떤 상황에서 무얼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걸 내가 다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후로 대화하는 여유가 생겼다. 모임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부담보다는 한 명 한 명이 가진 이야기가 재밌게 들리고 편해졌다. 조금 더 들어보는 힘이 얼마나 귀한지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