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지 않나요?
거의 3년째 에세이를 쓰는 독서 모임을 하고 있으니 동료가 물었다.
"그렇게 계속 쓸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또 계속하다 보니까 생기더라고요." 나는 답했다.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려운 질문이었다. 쓸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기 때문에. 막 쓰기 시작할 때는 사람들이 나를 모르니까 나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될 수 있었다. 가족, 연인, 직장, 취미, 건강. 단순한 것들을 한 번씩 건드리는 데도 꽤 많은 글이 필요했다. 대충 알던 나, 어렴풋이 느끼던 감정들, 반복되는 사유를 자세히 정리하는 동안 점점 쓰기에 매료되었다. 무언가를 구체화하면서 이해되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내가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지는 못했으니까. 괴롭지만 필요했던 이해의 과정이 반가웠다. 또 그렇게 그려낸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안심되고 점점 나를 꺼내 보이는 게 편해졌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나를 다 꺼내고 나니 글 창고가 비어버렸다. 널 알려줘 네 글을 기다릴게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는 무얼 알려줘야 할지 모르겠고 이미 속을 다 보여줘서 투명해진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재미난 이야기를 꺼내면 내 일상은 왜 이리 단조로운가 싶고, 짙은 통찰을 읽고 나면 그들의 연륜에 압도되었다. 연륜 앞에서 나는 납작한 글 밖에 꺼낼 수 없어. 부끄러워. 좌절감이 심해서 같이 쓰는 것도 같이 읽는 것도 포기하고 싶던 적이 많았다.
생각보다 우리는 스스로를 모른다. 나는 나로 살 수밖에 없으니 반복되는 것은 인식되지 않고 쉽게 흘러간다. 자꾸만 다른 이가 가진 것들만 눈에 띈다. 더는 나에 대해 쓸 게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나는 내가 지겨웠다. 너무 지겨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재미도 없고 이미 다 아는 나.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사는 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없는 나. 그 사실이 울적해서 일상까지 어두워지려 했다. 계속 글을 쓰려면, 삶을 생기 있게 살려면 지겨운 나와 타협을 하든 화해를 해야 했다. 그때 책을 더 유심히 봤다. 소설에서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말하지? 철학서에서는 어떤 에피소드로 하고픈 말을 건네지? 에세이는 어떤 사람들이 쓰는 거지? 하고. 모임 사람들이 써내는 글도 더 유심히 봤다. 그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을 만나면 질투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실컷 감탄하고 부러워했다. 어쩌면 내가 쓸 수 없는 말들이 세상에 너무 많으니까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책이든 직접 쓴 에세이든 모임을 위해 같이 읽고 대화할 때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오호 깊은 감탄사를 뱉기도 하고 인상적이라며 종이에 적어가기도 했다. 무심코 한 말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고마워했다. 그들은 나를 한 톨도 지겨워하지 않았다. 늘 새로워했다. 의견을 듣고 싶어 했고 귀 기울였다. 그걸 보고 나도 나만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나 보구나, 그렇다면 계속 글을 써봐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볼 수 없는 내가 있다면 그들의 눈으로는 내게 아직 새로울 것이 남아 있다면 계속 그들 사이로 가서 읽고 쓰는 수밖에 없다. 그들이 알아봐 주는 것까지 살을 붙이고 시야를 덧대어 계속 지루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다. 혼자서는 알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그래서 통찰이 고갈되고 창작이 고통스러워도 같이 읽고 쓰는 걸 걸 멈출 수가 없다.
글감을 받아 한 달 내내 곱씹고 또 곱씹다 보면 또 희한하게 뭐라도 쓸거리가 생긴다. 때로는 글감대로 삶이 말려들어가는 것 같아 소름이 돋을 만큼, 이거 모임장 님이 무당 같아 이상해 싶을 만큼 말이다. 지루하게 넘겼을 수도 있는 일상에 '휴대폰', '여름', '서울', '케이크', '사회초년생', '편의점', '유명인' 등 랜덤한 단어들을 붙들고 다니다 보면 뭐가 떠오른다. 어느 날 갑자기 특이한 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듯이 생기기도 하고 무심했던 기억이 퐁실 떠올라 그 안에 잠겨 오래 전의 나를 뒤늦게 이해하기도 한다. 일단 쓸거리가 생겼다면 문장력이나 구조에 부족함을 느끼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건 인풋을 넣으면 될 일이다. 한동안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아웃풋이 아쉬울 때가 있었는데 그땐 우선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한 다음에 그 말과 어울리는 정서가 담긴 책부터 한 권 읽었다. 시인의 끈적한 산문을 읽을 때도 있었고 오래된 90년대 소설을 읽기도 했다. 읽고 나면 그 문투나 전개가 알게 모르게 흡수되는지 쓰는 글에도 담겼다. 누군가의 글을 흉내 낸다기보다는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에 이미 통달한 사람의 분위기에 마음을 적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꺼내보는 것이다. 그렇게 영감을 채우고 쓴 글들은 유난히 반응이 좋았다. 하고 싶었던 말이 가다가 흐려지지 않고 꽤 온전하게 전해졌다.
괴로워도 쓰는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이만한 나로 살기에도 어렵단 생각이 자주 들어서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내심 이해심 그런 것들이 회사 생활을 하면서 자꾸만 휘발되려 하는 게 무섭다. 말을 잘하고 싶어서 읽고 겁이 나도 말할 수 있는 기회들을 찾아 연습하고 잠을 아껴가며 글을 적었는데. 딱딱한 회사어로 하루 8시간에서 길게는 12시간을 말하다 보면 무섭게 버릇이 밴다. 예를 들면 그냥 편하게 질문하면 될 때에도 질문 뒤에 변명처럼 어째 어째해서 여쭈어요 다급하게 방어하는 태도를 붙인다거나, 의견을 과하게 돌려 돌려 감싸 말하는 경우들. 보고하는 말투가 스며 공격적인 투가 되거나 인과 관계에 집착해서 '~라서', '~때문에'라는 연결어만 연달아 반복하는 것까지. 그런 내 모습이 꼴불견이다. 감정 쓰는 에너지가 고갈되어 고개를 쉽게 돌려버리는 자세. 중요한 게 뭔지 따져 묻고 누구보다 빠르게 포기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때로는 효율적인 스킬임에도 미울 때가 많다. 그런 어투로만 말하다 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거다. 언어는 세상을 인식하는 창과 다름없으니까. 굳어버린 어깨나 허리를 재활 치료하고 요가나 필라테스로 풀어주듯이 굳어버리는 언어 감각을 글쓰기로 읽기로 풀어낸다.
글 창고가 비었으면 채우고 가득 찼으면 내보낸다. 그래야 내가 나를 지겨워하지 않고 지루해도 애틋한 구석을 지키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내가 읽지 못한 책이 많고 같이 읽을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바닥까지 절망하는 날 끝까지 붙들 수 있는 희망이다. 또 이번 달에는 무얼 꺼내야 하나 창고가 비어 곤란하다. 또 어떻게든 무슨 이야기든 차분히 꺼내어 볼 거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