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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27. 2024

책을 선물하는 마음

어쩌면 가장 센 응원

책을 좋아하지만 선물은 잘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책은 아무 의미 없는 종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마음을 담아도 전해지지 않을 거라면 누구에게나 맛있는 과일이나 쌀쌀한 날에 어울리는 티백을 선물하는 게 낫다. 책은 꼭 그 마음을 알아봐 줄 거란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만 전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책을 선물하는 일은 특히 어려운데, 취향을 저격하겠어란 생각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 내게도 좋았는데 당신에게도 이런 의미가 되어주면 좋겠다 고백하듯 접근하는 게 대체로 좋았다. 책을 줄 때는 그냥 준 적은 거의 없고 가능하면 꼭 엽서를 적는다. 왜 당신에게 이걸 주고 싶었는지, 어떤 마음인지 적고 아래 부분은 칸을 조금 남긴다. 책에서 인상적인 구절을 골라 골라 눈에 잘 띄도록 다른 색깔 펜으로 꾹꾹 눌러 쓴다. 그냥 종이로, 글자로, 낱말들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해 의미를 담아보는 것이다. 이왕이면 유효한 선물이 되라고 내가 읽어본 책 중에서 고른다. 좋은 문장들을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게 밑줄을 긋고 알록달록 인덱스를 붙이는 덕에 엽서에 적을 궁극의 문장을 찾기가 수월하다.


그러고 보니 책 선물은 유독 회사 분들께 많이 했다. 선배 후배 할 것 없이 다양하게. 친구들에게도 준 적이 많지만 점점 회사 분들에게 가는 횟수가 커진다. 책이 가진 문제해결의 힘이 회사 생활에 특히 도움이 된다고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직장인이라면 고민 하나씩 늘상 가지고 살고 거의 매일 위로가 필요하다. 그럴 때 책만큼 응원이 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일단 읽는 근육이 있고 전해오는 응원을 차분히 알아볼 의향이 있다면 말이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면 반갑다. 어떻게든 마음을 전할 길 하나는 뚫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의 직속 리더님도 책을 좋아한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주위에 책이 자주 보이고, 주말에 회사 근처 교보문고에서 홀로 심취해서 이 책 저 책을 미간 찌푸리며 보고 있다가 우연히 만나 민망했던 적도 있다. 바쁘게 일을 하다 보면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고 그래서 서로 긴장감만 가득해질 때가 있다. 존경한다고 응원하고 있다고 전하고 싶어도 아부 같을까 객기 같을까 오지랖일까 걱정하느라 세월만 지나가곤 했다. 그러다 한 책을 읽는데 내내 리더님이 생각났다. 릭 루빈의 <창조적 행위>에서 예술적으로 사는 게 무엇인지 알아가는데 어라 이거 우리 리더님이 자주 하던 말씀이랑 비슷하다. 이런 말이 곁에 있으면 힘이 되시겠다. 영감이 되어줄 수 있겠다 계속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 날도 아니지만 가장 빳빳한 책 한 권을 골라 사서 엽서를 적고 다이소에서 박스를 사다 포장했다. 폭풍 같은 업무 사이 잠시 틈이 났을 때 두근두근 꺼내 전했다. 담백하게 오 고마워요 그러고 바로 서로의 일에 집중했다. 긴장한 것에 비해 선물 증정이 빠르게 끝났지만 주고픈 마음이 가득한 때에 잘 전한 것 만으로 만족스러웠다. 응원이 내 손을 떠났으니 할 일은 다했고 나는 그 일을 금세 잊어버렸다.


하루는 재택근무를 몇 주간 하다가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갔는데 UX 라이팅에 대한 책이 두권 내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뭐 아무 표시도 없어서 이건 어디서 난 건지 회사에서 전체 사원들에게 나눠주는 건지 누가 지나가다 잠깐 놓고 간 건지 어리둥절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재택 근무하는 동료들의 빈자리만 휑덩그렁 있을 뿐 힌트가 하나도 없었다. 미스터리 하지만 기분은 좋게 일하다가 문득 맨 앞장에 뭔가 적혀있으려나 싶어 표지를 들춰보았다. 거기 글자가 가득한 포스트잇이 주욱 붙어 있었다. 몇 개월 만에 내가 보낸 엽서에 답장이 온 것이다. 리더님은 두고두고 영감이 되어줄 책 고맙다고, 잘 보고 있다면서 내게는 말에 힘을 보태줄 책을 전한다고 하셨다. 한 권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는 책이고 한 권은 같이 읽어보려고 두 권을 샀다고 했다. 우리 같이 더 공부하자, 더 나은 사람이 되자 그런 말 같아서 크게 감동 받았다. 내가 책을 전할 때는 이 정도의 마음이 가닿기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막상 받아보니 책으로 다가오는 응원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상위 조직장 님까지 함께 회식을 하던 어떤 날이었다. 최근에 소설을 많이 읽고 있고, 이야기가 주는 위안이 참 좋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깊이 공감했다. 소설에 위안을 받는 분이라는 게 응원할 수 있다는 기회처럼 느껴져서 가방에 들고 나온 최진영 작가의 신간 <단 한 사람>을 꺼내 쥐어드렸다. 엽서를 쓸 틈은 없었지만 눈빛으로 응원을 전해보았다. 보통 한국문학 책들이 출간 직후 초판본만 양장본으로 나오고 이후에는 소프트 커버로 나오는데 나는 양장본을 좋아해서 관심 있는 작가 작품은 출간일을 미리 봐두었다가 서점에 달려가서 딱딱한 커버를 소장한다. 그것도 제일 깔끔한 것으로 직접 만져보고 고른 양장본이었다. 그날 처음 들고 나선 소중한 책을 아까운 마음 하나 없이 쿨하게 전하고 이번에도 잊고 살았다. 그리고 한참 뒤 조직장 님과 단 둘이 점심을 먹을 기회가 있을 때 늘 얻어먹고 챙김 받는 것이 감사해서 문장력 좋은 책 한 권을 골라 갔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작은 파티 드레스>. 나도 기회가 될 때 작은 응원이라도 전하고 싶었다고 수줍은 엽서를 적었다. 조직장 님은 별 거 아닌 선물에 큰 감동을 받으셨다. 밥 먹을 때만 해도 일 이야기 위주로 긴장감 있게 대화하다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전하곤 서로 마음이 확 풀어져서 독서 모임 이야기도 잔뜩 하고 기록에 대해서 생각도 나누었다.


그 후로 조직장 님은 읽다 좋은 책이 있으면 조용히 모바일 선물하기로 보내주신다. 처음에는 서경석 작가의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을, 최근에는 권여선 작가의 <술꾼들의 모국어>를 받았다. '흰쌀밥에 연탄에 구운 굴비 표현을 읽는 순간, 이런 표현을 책 좋아하는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선물하셨다. 함께 이해할 수 있는 기쁨, 말맛 좋은 문장을 같이 즐기고 싶은 마음이 전해졌다. 나는 그런 문장들을 즐길줄 아는 사람으로 계속 살고 싶어졌다.


퇴사하고 하고픈 일을 할까 진로를 고민하는 동료에게는 선택에 대한 책을, 몇 달간 큰 프로젝트로 밤낮없이 달려오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 이탈리아로 긴긴 휴가를 떠나는 동료에게는 괴테의 이야기가 담긴 책을 선물했다. 괴테도 존재를 고민하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 후에 평생의 업적을 남겼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애정하는 사람들에게 꼭 맞는 책을 찾아 쥐어주는 것이 기뻐서 이제는 책을 읽을 때 자꾸 같이 읽고 싶은 사람들이 떠오른다.


회사 밖에서 독서 모임을 함께하는 인연들이 내게 준 책들도 있다. 글쓰기 모임의 한 분은 나를 보고 부희령 작가의 <무정 에세이> 속 [사랑 발굴단] 이야기가 떠올랐다 했다. 어떤 모임 날 써주신 에세이가 감동적이라 읽고 떠오른 말을 댓글로 길게 달았을 뿐인데 그 말이 너무 귀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고맙다며 책을 선물해 주셨다. 받아두고 펼쳐보지도 못하고 살다가 마음이 컴컴하고 찐득하던 날 문득 나를 떠올린 글이 무엇일까 궁금해서 [사랑 발굴단] 부분을 읽어보았다. 네 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산문인데 눈물이 줄줄 나왔다.


'추한 것을, 무례한 것을, 염치없는 것을 매력으로 삼는 일들이 너무 많아졌거든요. 매력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대놓고 욕을 퍼붓고, 눈앞에서 혐오를 드러내고 뻔뻔스럽게 욕심을 부리는 것으로 차이를 만들려고 애써요. 그러다 보니 잘 드러나지 않는 곱고 순한 것들이 자꾸 사라져요. ... 매력은 발굴하는 사람의 몫이어야 하거든요.' 


여린 미덕을 지키고 발굴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네 번 읽으면서 시원해질 때까지 울었다. 당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이 알았으면 해요. 그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이어도 꼭 그 마음이 귀하단 걸 알아줘요. 따스한 응원이 다가와 나를 안아주는 듯했다.


책을 선물하는 마음은 받는 이에게 가서 얼마나 더 커질지 모른다. 생에 변화를 줄 만큼 커다란 깨달음을 줄 수 있고 순간의 고비를 넘겨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같이 읽자 권하는 이유나 계기가 무엇이든 무엇을 전하고 싶든, 같이 읽는 우리는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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