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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26. 2024

덕분에 네트워킹

주니어들의 독서 회동

조직 이동을 할 때 나는 또 한 번 책의 덕을 보았다. 아무도 모르는 곳, 살짝 달라진 업무 환경에서 모든 것이 리셋되어 다시 시작하는 날들이었다. 경력직으로 이동하면 더 어렵다더니 눈치도 많이 보이고 뭐가 궁금해도 멍청한 질문이 될까 속으로 한번 더 거르면서 말마다 타이밍을 재곤 했다. 이전 팀에 비해 사람도 많고 연령대도 다양한 새 팀에는 또래 친구들이 많이 있었다. 걸어가며 농담하고 일하면서도 편하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전에는 한참 선배들만 있는 작은 팀에서 일했기 때문에 그런 활기에 동경을 느꼈다. 엄밀히 말하면 같은 센터 안에 속한 다른 팀 친구들이라 선뜻 다가가기는 어려웠는데 한 마당발 선배가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렇게 옆팀 친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취미가 무엇인지 물어 독서 모임을 몇 개 하고 있다고 답했다. 첫 만남에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생길 수도 있지만 취미는 정말 책뿐이라 그렇게 말했다. 다독가는 아녀도 꾸준히 가방에 책 한 권 들고 다니는 애독가이고 사람들과 모여서 책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동료들은 반가운 얼굴로 마침 센터 또래들끼리 하는 마케팅 독서 모임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원한다면 같이 해보자고. 다른 멤버들은 안 물어봐도 다 좋아할 거라며 웃는데 어쩜 저렇게 낯선 사람에게 열린 마음으로 대하지 놀랍고 고마웠다.


나이가 거의 비슷한 일곱 명의 마케터들이 모여 경영 서적을 읽는 그 모임엔 '라이프 온 마케팅'이라는 멋지구리한 이름도 있었다. 줄임말로는 라마. 하얗고 복슬거리는 동물 라마 이모지를 붙인 단체 메신저 방에 초대를 받아 반갑습니다 인사를 전하는데 내내 긴장으로 조이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상냥한 인사와 환영의 이모티콘이 잔뜩 돌아왔다. 이 모임에서는 주로 주변 마케터 선배들이 추천하는 책을 읽곤 했다. 좋은 책을 추천 받으려고 팀 리더 님들에게 독서 모임을 알리면 그거 술모임 아니야? 하고 장난 가득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그런 식으로 달에 한 권 마케팅, 브랜딩, 경영, 경제 서적을 골라 같이 읽고 점심시간을 틈타 모임을 진행했다. 책을 하나씩 들고 밥을 먹으러 우르르 내려가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선배들은 흥미롭게 정말 책을 읽긴 읽나 보네 여전히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마케팅 분야의 책은 보통 다른 장르의 것들보다 두꺼워서 주니어들의 독서 회동을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한 번은 600페이지가 넘는 행동 경제학 책을 들고 있으니 지나가던 선배가 정말 이걸 다 읽어? 물어왔다. 나는 괜히 찔리는 사람처럼 이것 보세요, 인덱스를 이만큼이나 붙였어요! 자랑을 했고 조금 덜 읽은 동료는 수줍게 아 저는 사실 뒤에 조금 못 읽었습니다 허허 웃었다.


빠르게 점심을 먹고 식판을 치운 뒤 같은 자리에서 두툼한 책을 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날 미리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만나서 그걸 주제로 이야기한 날도 있고 그냥 생각 나는 대로 자유롭게 대화를 나눈 날도 있다. 회사 사람들이 밥 먹고 커피 마시는 공간 한복판에 빙 둘러앉아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말하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각자가 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고민을 꺼내고 서로가 조언도 해보고 공감의 파도타기가 이어진다. 끝에는 꼭 우리 회사는 지금 어떤가, 어떻게 더 나아지면 좋을까로 대화가 흘러갔다. 이거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무슨 전략 회의 같겠는데요. 4-5년 차 주니어들이 모여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웃기겠는데요. 틈틈이 스스로 대견해하다 우스워하면서 한 시간을 알차게 보냈다. 옆 팀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듣고 내가 하는 일과 어떻게 닮았고 또 다른지를 알아갔다.


조직을 옮기고 처음 몇 개월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던 시간. 사무실의 공기까지 어깨를 무겁게 하는 나날엔 화장실 가다 라마 친구들을 마주치면 한 번씩 숨이 트였다. 유난히 다정한 눈빛을 가진 친구는 오늘 괜찮아요? 별말 없이 생긋 눈을 마주치고 다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거리고 지나쳤는데 그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뭐라고 용기가 생겼다. 발랄한 성격에 늘 선하게 웃는 친구는 마주치면 멀리서부터 양손을 강아지 꼬리 흔들 듯 신나게 휘저으면서 다가온다. 가까워지면 박수를 치고 손을 붙잡고 둥가둥가 하면서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마치 이 조직이 나를 환영하는 것 같이 느껴져 두려움이 조금씩 떨쳐졌다. 로봇처럼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동료는 마주치면 서로 정중한 투로 인사하고 껄껄 웃고 헤어지는데 그것도 나름대로 귀여웠고, 또 어떤 친구는 누구든 마주치면 뻔뻔스럽게 어머 아름다우세요~ 오늘 참 화사하세요~ 칭찬을 던져서 뜬금없이 푸하하 크게 한번 웃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한 덕분에 사람들이 오고 연결이 생겼다. 나는 그 유대감을 붙들고 적응을 해나갔다. 책을 좋아하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옮겨온 곳에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이 있다니 이직이 두려워도 시도하길 잘했다고 나의 선택을 인정했다.


보면 회사에서 같은 직무로 일해도 사람마다 강점이 다 다르다.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데이터를 잘 보는 사람이 있고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여러 유형 중 나와 가장 멀다고 생각하는 건 네트워킹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네트워킹을 잘하는 사람들은 아는 사람도 많고 약속도 많다. 그 덕에 이런저런 정보도 많고 뭐가 필요하면 빠르게 전화해서 물어볼 사람도 많다. 어려운 일도 쉽게 해결하는 그 힘이 부러웠다. 무엇이든 멋져 보이면 빨리 따라 하고 쉽게 배우는 편인데 그것 만큼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네트워킹을 잘하는 사람은 왠지 시기를 받기도 하고 실력 대신 인맥으로 때운다는 식으로 평가절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그 능력을 가지고 싶어도 성격을 거스르면서까지 갖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먼저 이 조직에서 일해온 독서모임 친구들이 나에게 업무적으로도 힘이 될 때가 많았다. 사내 어드민 조작 방법부터 어떤 이벤트를 진행한 노하우를 물어보고 필요한 결재 양식 예시를 받는 일까지. 필요할 때 당황스러울 때 편하게 물어볼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서 더 빠르게 일을 익혔다. 손에 도구가 많아지니 더 다양하게 사고할 수 있었고 원하는 것들을 물어물어 시도해 볼 수가 있었다.


나 이후로 몇몇의 동료 분들이 더 팀에 합류했을 때 나는 이 마케팅 조직에서 아는 것 많고 친구도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건 잘 못해. 생각했던 네트워킹을 나도 모르게 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보니 네트워킹이란 게 별게 아니다. 실력 없는 사람의 꼼수 같은 것도 아니다. 주위에 물어볼 사람이 있는지. 뭘 물어볼 때 불편하지 않고 서로에게 든든한 존재인지. 그런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는지. 그게 네트워킹이었다. 그건 하나의 능력일 수밖에 없다. 묻기만 하는 사람을 반길 이는 없기 때문에. 나도 네게 그런 존재가 될게. 나에게도 네가 물을 것이 있고 도움이 되면 좋겠어 생각하면서 스스로의 능력도 길러야 서로에게 계속 도움을 줄 수 있다. 팀에서 데이터를 잘 다루는 나는 내가 잘하는 걸로 친구들에게 보답한다. 고맙다는 말에 진심을 담는 방법은 내게도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해 내가 줄 수 있는 걸 주는 것뿐이다. 그러면 다음에 물을 때도 조금 덜 미안할 수 있다. 바쁜데 한술 더 뜨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일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힘이 되는 존재가 되는 게 네트워킹이라면 나는 이제 네트워킹을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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