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하는 캐릭터
오래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텍스트보다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 있다.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뭐가 고민이고, 무얼 하고 싶고, 어떤 마음인지. 그가 하는 말과 써낸 글에서 어렴풋이 느껴진다. 결혼을 하고 싶은 상태라면 소설 속 인물을 두고 저런 이와 함께하면 삶이 즐겁진 않을 거란 생각부터 하고,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라면 모험하는 이야기에 유독 감동하거나 인물의 남다른 투지에 감응한다. 똑같은 글을 읽고 서로 다른 부분을 붙들고 있었단 걸 알고 놀라는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확인한다. 사람은 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바깥에서 찾으니까. 음악과 책과 영화에서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니까 아무리 무슨 상을 받은 대단한 명문이라고 해도 지금의 나와 관계없이 느껴지는 내용엔 감흥이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야기에서 무얼 보는지, 무얼 말하는지 관찰하다 보면 그의 마음에 요즘 무엇이 들어차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일이 고민이구나, 이 사람은 남들과 다른 일상을 보내서 이런 걸 매번 찾아내지. 이 사람은 마음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구나. 그런 이해의 시간이 겹치고 이어지면 어느 순간부터 같이 읽는 사람들까지 한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느껴진다. 잘 되었으면 좋겠고 잘 살았으면 좋겠고 소망하는 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진다. 소설의 주인공을 안쓰러워하고 응원하는 것처럼 그들을 내 인생 몇 페이지의 캐릭터 삼는 것이다.
응원하는 캐릭터가 많은데 그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W님은 책을 읽고 에세이도 함께 쓰는 독서 모임에서 만나 2년 넘게 같이 읽고 쓰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글에는 늘 질문이 주요 키워드로 나왔고, 그는 인생에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자주 말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누굴 알아가고 이해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사람 같다. 그는 늘 묵묵히 듣고 있다가 대화의 빈 공기 사이에 두 손을 꼬옥 모으고 신중하게 한마디 물어 온다. 그러면 스르르 마음의 긴장을 놓고 솔직하게 말을 꺼내게 된다.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대학에서 심리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 길이 좋아서 대학원까지 가 더 공부했지만 중간에 포기하고 가족 사업을 돕는 중이라고 처음 자신을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매사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그가 어느 날 부탁 있다고 말을 걸어왔다. 상대가 당황하지 않게 운을 띄우는 서론과 듣는 이가 빠져나갈 구멍을 함께 주느라 길어진 메시지를 보고 부탁하는 게 정말 어려운 사람이구나 느꼈다. 나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말 뒤의 마음이 더 눈에 띄었다. 그 같은 사람이 하는 부탁이래야 뭐 대단히 황당할 리 없다 생각해 뭐든 좋으니 말해보라고 했다.
“저 상담을 더 공부하려고 해요. 다시 대학원에 지원하는데 추천서가 필요하거든요. 혹시 추천서를 써주실 수 있을까요? 꼭 나현 님께 부탁드리고 싶어요."
예? 제가 그런 걸 해도 되나요? 그런 건 학부 때 교수님이나 뭐 직장 상사 같이 어느 정도 권위 있는 사람이 써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응할지 거절할지 판단을 하기도 전에 이 부탁이 정말 내게 와도 되는 건지를 먼저 되물었다.
“추천인에 조건은 없어요. 함께 지낸 지 1년 이상만 되면 누구든 써도 된다고 해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뭐라고 그를 추천한단 말인가. 석사 지원이라는 게 장난스레 여러 번 시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에 한번 원기옥을 모아 지원하는 것인데 이래도 될까 싶었다. 일단 W님은 충분히 추천할 만한 사람이었기에 추천하는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로 인해 소중한 도전이 어그러질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교수님들이 나현 님 글을 좋아하실 것 같아요. 이 독서 모임을 주제로 지원서를 썼거든요. 그래서 함께 활동한 나현 님께 부탁하고 싶었어요. 평소에 사람을 따스하게 바라보시는 그 시선으로 편하게 적어주시면 되는데... 아 아무리 이렇게 말한들 어려운 부탁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나현 님 외에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
그의 말에서 묘한 확신이 느껴졌다. 나보다 나를 더 믿는 듯한 확신이 고마웠다. 중요한 일인 만큼 뭉클한 부탁이었다. 그래. 나의 시선을 믿는 이에게 편지를 한편 쓴다고 생각하지 뭐.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생각을 편안하게 바깥에 내놓을 수 있게 믿어주는 관계. 그래 괜찮으니까 말해봐, 눈을 동그랗게 둥그랗게 뜨고 또렷한 눈빛을 보내주는 귀한 얼굴들. 때로는 사랑이라고 밖에 표현하기 어려운 애정을 책 사이에 붙여 시간을 쌓아가는 열댓 명의 특이한 사람들. 독서 모임이라는 투박한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대화를 두고 그는 집단 상담의 이상적인 방향을 본 것 같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고 좋다고. 나는 사실 그가 장래에 무얼 하겠다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공감의 감동을 다른 사람들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겠거니 이해할 뿐이었다.
추천서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그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 그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설득을 해야 하는데. 어렵게 느껴져 확 겁을 먹기 전에 단순하게 접근해 봤다. 모임을 하면서 그에게 배운 게 뭐였더라 하고. 우선 질문하는 것. 그는 모임 전에 써서 내는 글에 하나하나 긴 댓글을 다는 사람이었다. 우리 모임 자체가 서로의 글에 댓글을 활발히 남기는 모임이지만 많은 말들 사이에 늘 그의 댓글이 가장 길었다. 언제 한 번은 댓글 하나 다는데 한 시간쯤이 걸린다고 해서 모두가 놀랐다. 나이도 직업도 다른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할지 모른다. 삶이 제각각이라 겪어봐서 공감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그럴 때 그는 어물쩍 아는 척을 하기보다는 쓴이가 표현한 작은 시선, 말 한마디를 붙들고 질문했다. 잘 질문하기 위해서는 내가 무얼 알고 무얼 모르는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는 그 구분을 잘했다. 내가 아는 게 다야, 그건 이래 단정 짓거나 빠르게 인식한다면 뭐든 궁금하지도 않거니와 진심 어린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애매한 질문은 무례가 되거나 놀림이 되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저는 이만큼 알 것 같은데 맞나요. 이건 잘 모르겠어요. 더 알려주세요. 쭈볏쭈볏 자신을 꺼내는 사람에게 그런 사려 깊은 질문과 호기심은 반갑다. 알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주는 타인에 속절없이 마음을 열게 된다.
질문을 잘하는 것도 어렵지만 잘 듣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끄덕끄덕한다고 잘 듣는 것도 아니고 비슷한 생각이나 경험을 꺼내 빠르게 대꾸한다고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게 아닌 경우가 많다. 경청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W님을 보고 깨달은 것이 있다. 그는 기억력이 정말 좋다. 누가 어떤 글에서 했던 말, 책에 대한 감상, 최근의 어떤 변화 한번 읽고 대화한 걸 그는 참 잘 기억했다. 나 역시 이 모임에서 댓글 요정으로 이름난 사람이지만 나는 자꾸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우와 그러셨구나!' 하고 곧바로 '아 저번에 말씀해주셨죠. 맞다 맞다' 기억을 못 하고 수습하느라 상대를 실망시킨 적도 꽤 있다. 바빠서 머리에 더 들어갈 용량이 없는 거야. 핑계를 대기엔 그 바쁜 사람들은 날 잘 기억해 주었다. 소중하다고 여기면 기억할 것이다. 나는 경청을 애써 만들어서 그 자리에 두고 앞으로 달려갔다. 듣고 끝이 아니라 기억을 해야 그 관계가 뚝뚝 끊어지지 않고 선형으로 쌓여 서로에게 든든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는 사소한 고민이나 농담까지 그렇게 잘 기억해서 그런 말을 한 사람도 잊고 사는 사유를 꺼내어 다시 보여주었다. 나는 내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잘 듣는 게 무엇인지를 그런 대화에서 배웠다.
잘 질문하고 잘 기억하는 끈기와 노력, 끊임없이 주변을 궁금해하는 마음. 그런 능력이 있는 이가 부디 상담을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추천서를 적었다.
저는 심리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만 W님이 심리를 공부했고 앞으로 더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했을 때,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삶이 어려운 사람들, 단단한 지지대 같은 관계를 찾지 못해 흔들리는 사람들이 W님을 만나면 제가 독서 모임에서 경험한 우연의 행운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정확히 듣고 이해하고 모르겠는 건 솔직하게 질문하고 잘 기억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면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나를 이해해 주어 고마운 마음과 이 세상에 그런 사람 간의 이해가 가능하다는 걸 믿게 해 주어 감사한 마음이 함께 생깁니다. W님과 1년 넘게 모임을 함께 한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상담 심리 전문가가 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마워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깊은 이해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란 걸 믿게 될까, 기쁘게 경험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까 희망적인 마음이 됩니다.
부드러운 대인 관계 능력과 성실함. 무엇보다도 사람에 대한 이해의 노력을 멈추지 않는 W 지원자를 진심을 담아 추천합니다.
한 사람에게 배운 것을 곱씹다 보니 이해받고 이해할 기회가 주어지는 나의 행운에게도 감사하게 되었다. 이걸 추천서라고 해도 괜찮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걸 쓰면서 대화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다시금 기억했다. W님은 얼마 뒤 서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잘 안되면 제가 추천서 엉성하게 쓴 탓으로 하시죠. 면접까지 파이팅 하세요! 넉살을 떨었는데 그는 끝까지 잘 해내어 원하던 공부를 시작했다. 응원하는 캐릭터가 도전에 성공하여 계속 계속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