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책을 같이 읽는 방법
사내 동아리에 북클럽이 있는데 거기 멤버 수가 200명 가까이 된다. 그 많은 인원이 다 같이 모이는 것은 아니고 모임장들이 컨셉을 잡으면 선착순으로 신청을 받아서 10명~15명 정도 한 팀이 되는 구조이다. 나는 여러 특색 있는 모임들 중에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읽는 자유책 모임에 들어갔다. 이미 다른 독서 모임에 참여하고 있어서 달마다 읽어야 하는 책이 몇 권씩 있었기 때문에 가끔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게 지정 도서가 없는 모임으로 선택했다. 그냥 만나기로 한 날에 책 한 권 가져가서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소개를 하면 되는 거라 부담이 없었다. 그 모임에는 책을 좋아하는 분들 또는 책을 꾸준히 읽고 싶은 분들이 모였다. 개발자, 기획자, 마케터, 세일즈 직무도 다양했다. 각자가 들고 온 책도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다른 색이었다. <역행자>부터 <파친코>, 업무 관련 도서 그리고 무슨 두꺼운 진화론 기반 과학책까지. 이렇게까지 장르가 안 겹친다고 싶을 만큼 서로 달랐다. 세상에 저런 책도 있다니. 이름만 많이 들어본 이 책은 생각과는 다른 느낌이구나. 내가 도서관과 서점에서 5분 이상 서성이지 않았던 쪽, 그 앞에서 눈을 빛내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재밌었다.
나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 생각지도 못한 내용을 다루는 책. 그런 것들은 분명 흥미롭지만 거리감이 있다. 첫 모임은 세 시간 넘게 진행되었고 모두가 즐기고 있다 생각했는데 다음 달에 반 정도의 인원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다음 달엔 둘셋만 남아서 모임이 흐지부지 되었다. 아무래도 공통으로 공유하는 것 없이 무작정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하다 보니 사람 간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고 그 거리감이 더 드러나게 된 게 아니었을까. 넌 나와 달라. 그다음 문장으로 '하지만 좋아'가 나오기란 쉽지 않다. 사람은 비슷한 걸 좋아하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뭐 하나라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지점을 찾기 마련이니까. 마음을 열고 나와 다른 것을 재미로 생각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한데 바쁜 직장인들은 중요하지 않은 걸 빠르게 포기하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나 또한 시간 부족에 시달리는 직장인이니 포기하는 마음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애써 모임을 운영하는 모임장 님이 속상해하는 것이 안쓰러웠고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지 못하는 게 서운했다.
사람들은 어떻게 책을 고를까? 나는 그때그때 고민거리 흥밋거리가 무엇이냐에 따라 책이 눈에 들어오는 편이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고 한들 지금 내 안에 둥둥 떠다니는 키워드와 거리가 멀면 눈에 뵈지 않고 손이 가지 않는다. 다들 나와 비슷하게 책을 고르는 거라면 그들은 무슨 단어를 품고 살아갈까. 무슨 단어를 쥐고 있길래 저런 책을 읽는 걸까. 그런 게 궁금했다. 자유책 모임에서 그런 궁금증이 살짝 풀렸고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다. 그 재미로 멤버들이 계속 줄어드는 와중에도 굳건히 모임에 나간 것 같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서로가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 것도 무지 재밌지만 서로 다른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하지만 모임이 지속되려면 뭔가를 같이 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 모임에서 우리는 다른 책을 끝내 각자 읽은 것이고, 같이 읽는 사람들이 되지 못해 헤어진 것이다.
서로 다른 책을 읽는데 같이 읽는 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에 둥둥 떠오르는 그 키워드를 활용해 보자 생각했다. 누구나 생각할 법한, 그러나 누구도 똑같이 생각하지는 않을 것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알아서 원하는 책을 읽되 달마다 하나의 키워드를 정하는 걸로 새로운 모임을 구상했다. 공통의 키워드가 있고 각자가 그걸 생각하면 떠오르는 책을 읽는 것이다. 왜 그 주제에 그 책을 선택한 건지 이유를 듣는 재미가 있겠다 싶었다. 첫 모임만 키워드를 정해주고, 헤어지기 전에 한 명씩 쪽지에 근래 자주 생각하는 주제를 적고 무작위로 하나 고른다. 거기서 뽑힌 단어나 문장을 한 달 동안 각자 해석해서 떠오르는 책을 읽고 온다. 누가 쓴 키워드인지도 밝히지 않았다가 모임을 시작할 때 키워드의 주인이 왜 그 단어를 적었는지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한다. 그게 이 모임의 룰이다. 다른 책을 같이 읽기 위해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한 결과였다. 우리는 포털 사이트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까 모임 이름은 '검색어를 입력하세요'로 지었다. 혼자 모임을 구상하면서 노트 한 바닥을 가득 채우고 너무 신이 났다.
키워드 자유책 모임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만 읽는 모임이나 경제 인플루언서 사우 님이 주관하는 재테크 모임 다음으로 빠르게 신청이 마감되었다. 이번에도 서로 다른 직군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한 해가 막 시작된 때라 첫 번째 키워드는 '새해'로 정했다. 새해인데 어떤 책을 읽으세요?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낯선 사람들이 가장 큰 회의실에 책 한 권씩 가지고 앉았다. 새로운 해에는 읽다가 만 책을 완독 해보려고요. 하고 표지만 봐도 근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가지고 온 분이 있었고, 어릴 땐 책을 곧잘 읽었는데 아예 놓고 산지 오래되었어요. <하루 한 장 고전 수업> 책을 들고 다시 독서를 취미 삼고 싶다고 말한 분도 있었다. 벌써 한 10일 매일 읽었다고 뿌듯한 표정을 짓는 그분을 보며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도 정이 가고 응원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다짐하는 듯이 책을 고른 분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새해에 처음으로 서점에 가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책을 골라왔다고 했다. '새해'라는 키워드가 뭐 복잡할 필요 있나 싶더라고요. 그 말에 모든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나는 허 웃음이 났다. 그렇네 뭐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걸. 마음이 문득 가벼워졌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분은 <편지 잘 쓰는 법>을 가지고 온 분이었다. 제가 원래 편지 쓰는 걸 좋아하는데요. 연말에 편지를 많이 쓰다 보니까 잘 쓰고 싶더라고요. 새해에는 더 편지를 잘 써서 주고 싶어요. 연말에는 누군가 자주 떠올랐지만 새해에는 왠지 나만 생각하게 되었는데 편지를 더 잘 쓰고 싶어서 책을 읽었다니. 독서가 꼭 나만을 위한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요즘 자주 머리에 떠오르는 키워드를 적어주세요. 흰 종이와 펜을 쥐고 사람들은 한참 망설였다. 굳이 의식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자주 하고 지내는지 몰라 오래 떠올려 보는 것이다. 고심 끝에 쓰인 십 수개의 키워드 중에서 다음 주제로 '취향'이 뽑혔다. 사람들은 '취향'이라는 단어를 듣고 골똘한 눈으로 집에 갔다. 모두가 떠나고 남아 뽑히지 않은 종이를 하나씩 열어봤다. '허무', '사랑', '자신감', '잠자기 전에 읽는 책' 등 다양한 말들이 적혀 있었다. 사람들이 같이 생각해 보자고 적은 주제들은 하나도 겹치지 않았다. 꾸깃한 종이를 쥐고 그 단어를 적은 이유가 뭐였을까 글씨 뒤의 이야기를 상상했다. 어쩌면 이 키워드 독서모임의 가장 재밌는 부분을 혼자만 비밀스럽게 읽는 게 간지러웠다.
'취향' 키워드 모임에도 정말 다양한 책들이 나왔다. 취향이랄 게 없이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서 고민이라 <나다운 게 뭔데>를, 단순히 표지가 취향이라서 <칵테일, 러브, 좀비>를. 고른 이유도 정말 제각각이었다. 피아노를 오래 치고 있어서 <굴드의 피아노>를 가지고 온 분은 그냥 회사에서 동료로 잠깐 만났다면 그분이 5년째 피아노를 치고 있고 굴드라는 천재 피아니스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진지한 인상에 연차 높은 남성 개발자 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고 오는 책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다양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내 사고가 얼마나 좁은지 많이 느꼈다. 또 한분은 <기억의 뇌과학>이라는 책을 들고 오셔서 아주 의아했다. 왜 '취향'에 뇌과학 책이 떠오르셨어요? 질문했다. 취향이란 건 강렬한 기억에서 나오는 거 아닐까? 생각이 들어서 읽었다면서. 얼마 전 랜디스 도넛을 처음 먹었을 때 충격적으로 맛있었는데 이제 도넛 취향을 물으면 그걸 답할 것 같다고. 그런 충격적인 기억이 취향이 되는 것 같다고 하셨다. 정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충격적으로 좋아서 다시 찾고 찾고 그러다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선호가 되는 거겠구나. 나의 취향이 어떤 기억에서 시작되었는지 더듬어보았다.
'봄 하면 생각나는 책', '지금까지 읽지 않은 장르의 책', '삶'까지 내가 상상하지 못한 주제로 책을 골라 읽고 내가 떠올리지 못한 사고방식과 책들을 만났다. 다들 급하게 야근을 하느라 참석을 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나 역시 그런 날들이 자주 찾아왔지만 내가 모임장이라 빠질 수가 없어서 일단 달려가서 모임을 하고 집에 가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독서 모임을 4개 하는 내게 주위 사람들은 참 대단하다고 하거나 웃으며 독서모임 광인이라고 별명을 지어주었다. 물론 나도 가끔 내가 진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영역 바깥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아서, 잠이 오지 않을 만큼 두근거리게 좋아서. 어떤 아이디어를 실제로 해볼 때 사람들의 반응이 재밌어서 자꾸 그렇게 같이 읽자고 애를 썼다. 그럼에도 격무에 모임 4개를 하니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키워드 자유책 모임은 6개월 동안 열심히 하다가 내려놓았다. 거기서 만난 분들과는 여전히 한두 달에 한번 점심을 먹으며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지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