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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06. 2024

최고 아웃풋의 초대

젊은 우리

내 친구 C는 서울국제도서전을 만드는 사람이다. 22년, 23년, 24년 벌써 세 번의 도서전을 성공리에 마쳤다. 서울국제도서전은 매년 인기가 커지더니 24년에는 유료 입장객이 15만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에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냐며 여기저기 뉴스가 나왔고 도파민 시대에 특이한 사회 현상으로 비칠 정도로 흥행했다. 줄이 너무 길어 입장하는 데만 1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그 축제. 나는 초대권을 받아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C가 도서전을 만드는 사람이 된 이후로 나와 친구들은 티켓을 구매하지 않는다. 얘들아 기다려봐. 내가 초대권 보낼게. 바빠서 연락두절이다가도 도서전이 열리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알리고, 꼭 초대권을 챙겨준다. C가 도서전을 만드는 게 유난히 신기하고 재밌게 느껴지는 것은 21년 도서전이 유명하지 않았을 때 우리가 함께 서울국제도서전 구경을 다녀왔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읽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대학 동기들에게 책 모임을 하자고 했다. 모임 이름은 '젊은 우리'. 그 아이들을 떠올리면 혁오 노래 TOMBOY의 '젊~은 우리~ 나이테는 잘 보이지 않고' 부분이 자꾸 떠올라서 이름으로 제안했다. 유치할 수도 있지만 나는 늘 젊음, 청춘 그런 것에 약했다. 나름 철저하게 허술한 규칙도 만들었다.


1. 공통으로 읽는 책은 없음 원하는 걸로 알아서 읽기

2. 이 책이 나에게 왜 필요했는지 생각해 보기

3. 읽고 보니 이 책이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말하기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영상으로 남겨서 유튜브에 올리자고 했다. C, K, L과 나는 대학 시절 영상 동아리를 함께한 사이라 뭔갈 만들자고 상상하는 동안에 이미 잔뜩 신이 났다. 첫 번째 영상의 주제는 '좋아하는 책'이었다. 무작정 책을 들고 모여서 카페 거리의 조용한 카페테라스 자리에 앉아 영상을 찍었다. 쭈뼛쭈뼛 좋아하는 책을 하나씩 소개하다가 사람들이 지나가면 민망해서 목소리가 작아졌지만 모두들 어색함이 주는 설렘을 느끼며 대화했다.


나는 김애란 작가의 <바깥은 여름>을 들고 갔다. 집이 인천인데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했을 때 왕복 4시간 거리가 억울하게 느껴져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집에 가서 하고픈 걸 할 텐데. 집이 멀어서 억지로 흥미 없는 영상을 보고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게 아쉬워서 책을 한 권씩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그때 읽는 즐거움을 알려준 작품이라고 했다. K는 내가 졸업식 때 선물한 정세랑 작가님의 <시선으로부터>를 가지고 왔다. 줄거리를 듣고 L 언니와 C가 책을 빌려달라 하길래 우리끼리 책을 빌려서 읽는 경우에 맨 앞장에 메모를 남겨서 돌려주자고 낭만적인 약속을 했다. L 언니는 그 책을 1년 반 만에 돌려주었고 그다음으로 빌려간 C는 또 그로부터 2년이 지나고 책을 반납했다. 거의 4년 만에 주인에게 돌아간 책은 샛노랗게 바래 있었다. C는 후에 부커상 최종 후보가 된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들고 와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는데 어딜 펼쳐도 특이하고 야하다고 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L 언니는 원래 책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읽는 게 재밌어서 모임을 함께했고 소중한 사람이 선물해 주었다는 <김봉현의 글쓰기 랩>을 좋아하는 책으로 가지고 나왔다.


독서 모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렸다. 그때는 지금처럼 코엑스에서 거대하게 하지 않고 성수에서 작은 규모로 진행됐었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던 시절이라 입장할 때 열을 재고 들어가서 입을 꽁꽁 막고 구경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 대한 전시, 웹툰에 대한 전시를 보고 출판사가 쭉 이어져 있는 부스들을 구경했다. 누구 하나 사라져서 찾아보면 사람들이 거의 없는 무슨 과학 체험까지 알뜰살뜰하고 있어서 웃겼다. 다들 막 독서에 흥미를 붙인 사람들이라 아는 책이 많지 않아 더, 온갖 책이 모여 있는 그곳이 재밌었다. 출판사 직원 분들이 나눠주시는 책갈피랑 엽서 같은 걸 잔뜩 받아 오는 맛도 있었다. 몇 시간을 돌고 돌고 겨우 빠져나와 근처 서울 숲에 가서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무슨 책을 샀는지 사은품으로 받은 작은 스티커까지 다 꺼내 놓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영상을 찍는다는 핑계로 서로 더 자세히 묻고 듣고 보여주었던 것 같다. 그건 왜 샀어?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재밌겠다. 뭐에 관심이 있어서 무슨 책을 샀는지를 듣다 보니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열심히 찍고 편집한 첫 영상을 올린 날이 생각난다. 얼마나 짜릿했던지. 더는 같은 학교를 다니지도, 같은 동아리를 하고 있지도 않은 우리가 모여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게 좋았다. 유튜브로 성공하면 더 좋고, 로또를 사는 기분으로 퇴근하고 밤에 또는 주말에 공을 들여 편집해서 올린 영상은 생각보다 조회수가 나오지 않았다. 하나에 삼백 사백 회쯤 나왔으니까. 그래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현업이 바빠 3회까지만 만들고 영상 제작은 포기했지만 우리는 언제 영상 때문에 모였냐는 듯이 모임을 이어갔다. 전염병으로 4인 이상 만나지 말라는 규제가 있을 때는 화상으로 모여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아무것도 읽고 있지 않으면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대화했다. 책은 그럴듯한 핑계가 되어줄 뿐, 책으로 시작한 대화는 늘 엉뚱하게 흘러 안 입는 옷 나눔 쇼가 되기도 하고 누구 하나가 고구마를 까먹으면 파도타기 야식 파티가 되기도 했다. 회사에서 어려운 점, 새로 시작한 운동, 건강 상태까지 무료 화상 회의 링크를 네 번 다섯 번을 더 만들어도 말이 끊기지 않았다.  


넷 중에 둘은 서울에서 일하고 하나는 경기도 하나는 경상도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독서모임을 이어가겠다는 핑계로 우르르 경기도 자취방에도 가고 경상도에도 놀러 갔다. 방에 있는 책장 하나를 두고도 한 권 한 권 물어보느라 한참을 수다가 이어졌고 함께 다니는 코스에는 책방 방문을 꼭 넣었다. 일이 바빠지고 몸이 멀어지면서 처음만큼 자주 보긴 어려워도 여전히 몇 달에 한 번씩은 만나서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매년 도서전은 약속을 하지 않아도 함께 가는 걸로 되어 있다. C는 도서전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작가님들을 섭외하고 출판사들과 조율하고 홈페이지를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알리느라 땀을 흘린다. 거기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업무들이 더해져 그렇게 큰 행사가 이뤄지는 거겠지. 도서전 팸플릿에 C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내 자식도 아닌데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몇만 명이 책과 작가님들 사이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주최 측 목걸이를 달고 바쁘게 다니는 내 친구, 정신없는 사이에도 친구들에게 굿즈랑 특별 기획 도서를 쥐어주려고 찾아다니는 다정한 아이. 그리고 여전히 눈을 반짝이면서 책을 들여다보고 나와서 맛난 걸 먹고 배꼽 잡고 웃긴 대화를 나누는 우리들.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은 새로운 인연을 맺는 것만큼 어렵다. 삶이 눈앞에 매일 밀려오는 때에는 더더욱. 학창 시절 친구들과 멀어지거나 서로 다른 세상에서 서로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독서모임이 C를 도서전 주최 측으로 데려가고 우리를 계속 함께하게 해 주었다. 소박하게 같이 읽던 C가 이제는 수많은 읽는 사람들을 모은다. 거대한 공간, 잔뜩 쌓인 책, 사뭇 진지한 사람들 사이에 가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책을 읽고 있구나 묘한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C는 도서전에 온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도파민이 엄청 나온다고 했다. 며칠간 북적북적했던 행사장이 없었던 일처럼 철거되고 사람들이 빠져나가면 한동안 울적할 정도라고 했다. 연극이 끝난 후 노래 가사처럼. 나는 그 일이 얼마나 멋진지 생각해 본다. 책 한 권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게 삶을 어디로 데려갈지, 어떤 힘을 지녔는지 알지 못한다. 친구들에게 뭔가를 같이 하자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그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얼마나 오래 함께하게 할지 우리는 모른다. 나는 우리 모임 최대 아웃풋의 초대를 기다리며 외롭지 않은 마음으로 계속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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