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책 읽으세요?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고민한다. 친구가 아닌 사이에 편하게 대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으면서도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는 없을까. 함께 있었는데도 어떤 말도 기억나지 않는 만남이 자꾸 늘어날 때. 할 말을 찾다가 그다지 관심 없는 연애 프로그램이나 가십으로 시간을 채울 때. 내가 왜 그런 소리를 했지. 앞으로는 차라리 침묵을 택하자 포기를 다짐할 때마다 소중한 것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민망한 마음이 두려워 묵묵하게 입을 다물면 편할까. 그렇게 관계의 기회를 놓치는 건 더 나은 선택인가. 아니 나는 좋은 질문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당신이 궁금해요 부담스럽지 않게 말하고 전 잘 듣는 사람이에요 눈빛으로 전해서 내 앞의 누군가가 안심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누구 앞에서든 나답게 말하고 싶으니까. 어딘가 있을 것만 같은 무적의 질문을 계속 찾는다.
내가 나답지 않게 말해서 자주 당황스러운 곳은 아무래도 회사다. 특히 선배나 어른들과 있을 때. 내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고 무얼 물어야 할지는 더 모르겠어서 땀이 삐질 나온다. 아무 말이나 하는 것 보다야 침착하게 기다리면 누구라도 침묵을 깰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나는 불편하다는 것을 들켜 상대도 어렵게 만들거나 쉽게 지루한 사람이 된다.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처음인 양 듣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만큼 그 일이 말하는 사람에게 중요하거나 인상적이라는 뜻일 테니까. 다만 내가 했던 이야기를 여러 번 꺼내는 건 조심해야 한다. 저는 당신과 대화한 게 기억이 안 나요. 이 이야기는 내가 어색할 때 꺼내는 적당한 레퍼토리예요. 티가 날 테니까.
회사에 부문장 님이 새로 오신 때였다. 내 위에 위에 위에 저 멀리 계신 분이니 말 한번 나누기 어렵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은 첫 달 내내 십 수개의 팀과 하나하나 식사 자리를 잡으셨다. 팀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실까. 우리 팀 차례를 기다리면서 다른 팀 분들을 마주칠 때 꼭 물어봤다. 어떤 이야기를 했어요? 팀원이 열 명쯤 되는 팀에 있는 분들은 다른 테이블에 멀리 앉아서 인사만 하고 직접 대화도 못해봤다고 했다. 또 한 일곱 명쯤 되는 팀의 동료 분은 부문장님이 편하게 대화해 주셔서 좋았다고 했다.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생각보다 편했다고. 나는 흥미로워서 무슨 질문이었는지 물었다.
"어릴 때 장래희망이 뭐냐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하다고요."
정말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였을 때 꿈꾸던 걸 꺼내면서 순수하게 뭔가를 좋아했던 마음을 말하고 또 지금은 어떤 마음으로 지내는지 자연스럽게 나올 테니까. 뭐라고 답하셨어요? 나도 답이 궁금했다. 짧게 답을 들었는데 오래 알아온 동료가 무얼 좋아하는 사람인지 처음으로 알았다. 그러게 나는 무얼 꿈꾸다 이렇게 일하고 있지 생각해 봤다. 아 이렇게도 처음 만난 사람을 알아갈 수 있구나.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과 얼른 대화해보고 싶었다. 그러면서 설핏 걱정이 되었다. 우리 팀은 TF라 팀원이 딱 셋 뿐인데 어쩌지. 어기적대다 멀리 앉아서 밥에 집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답변을 들으면서 여유부리기도 힘들 텐데. 대망의 그날, 두 명의 팀 동료들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비장한 눈으로 우리는 각자 더 잘해야 해 알지? 화이팅하며 식당으로 향했다.
저마다 어떤 커리어를 거쳐 이곳에 모였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는 건 금방 끝이 났다. 그다음부터는 음식이 나오지 않은 테이블 위에서 모두가 말을 이어갈 주제를 찾는 느낌이었다. 서로 잘 모르는데 서로 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질문 하나 하기도 어렵고 주제가 떠올라도 말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소개팅 보다 어려운 자리가 아닐까, 한 겨울인데 땀이 날 것 같다 생각하는 중에 동료 분이 물었다.
"뭐 좋아하세요?"
어색한 마음이 삐죽 보이는 막연한 질문이다 싶었다. 하지만 부문장님은 멋진 어른이었다. 우선 음악부터 말하자면 무엇, 그러면서 분야 별로 본인이 좋아하는 걸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 노래를 몰라서 아 그렇군요. 멋지군요. 하는 반응 밖에 못했다.
"영화감독은 데이비드 핀처라고.. 아시려나"
"파이트 클럽 감독이지요?"
나도 영화를 좋아해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몇 개 알고 있었다. 맞장구가 들어가니 말하는 입장에서도 머쓱함이 좀 가신 것처럼 보였다.
"작가는 음.. 제가 시인을 좋아하는데.. 황인찬이라고 있거든요."
"구관조 씻기기!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부문장 님은 어떻게 알지 싶어서 놀라시고, 내가 묘하게 스피드 퀴즈 답 맞추듯 말해서 모두가 웃었다. 그 작가는 독서 모임 책으로 알게 된 작가였다. 나는 마침 그 책을 며칠 전에 다 읽었다. 반가운 우연에 긴장은 어디로 갔는지 제가 독서 모임을 하는데요. 어쩜 이번에 딱 그분 책을 읽었어요. 그 작가님의 시가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이 책도 좋으니 다음에 한번 읽어보세요. 신이 나서 말했다. 팀원 분들이 내가 독서 모임을 5개 하고 있다고, 야근하다가도 달려간다고 놀리셨다.
잠시 격의 없이 책과 작가에 대해 말하고 있자니 문득 앞에 앉은 동료 분들이 머쓱해하셨다.
“전 책은 읽어야겠다 싶어도 잘 못 읽게 되더라고요.”
왠지 반성하는 투였다. 어디서든 책 이야기를 조금 하면 꼭 부끄럽다는 듯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그럼 나는 꼭 말한다. 책이 취미라고 하면 고상해 보이고 열정적으로 자기 계발하는 것 같지만 저는 성격 상 혼자 생각하고 같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서 책 읽고 독서 모임 가면 행복한 거라고. 누군가 운동을 좋아하고, 누군가 드라마를 좋아하고, 누군가 요리를 좋아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꼭 말한다. 책이 좋은 것뿐이에요. 글밥을 따라가다가 새로운 생각도 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게 늘어나는 게 좋을 뿐이에요. 저도 당신이 무언갈 좋아하는 모습이 참 멋지답니다. 길고 짧게 설명하곤 한다.
“두 분은 서핑을 사랑하세요. 매주 주말마다 강원도에 가서 서핑을 하시는데 그 열정이 정말 멋져요. 저는 몸치라 엄두도 나지 않는데 말이에요. “
우리는 그렇게 각자가 무얼 좋아하는지 한참 이야기 했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관계가 아니라 그냥 각자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 대 사람으로 요즘 무엇이 재미난 지를 말했다.
그 후 회사 복도에서 우연히 부문장님을 마주칠 때마다. 나 또는 부문장님이 묻는다.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저는 지금 장기 기증에 대한 프랑스 소설을 읽고 있어요. 그렇게 답한 날엔 최근에 장기 기증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냐고 놀라셨다. 나는 무슨 책 읽으세요 물었다가 집 가는 길에 한국인 독어 번역가 정영애 선생님의 책을 선물 받았다. 그 책에 수십 개의 밑줄을 그으며 계속 최선을 다해볼 용기를 얻었다.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전하지 조심스레 서점에 가보니 황인찬 시인이 몇년 만에 새 시집을 냈다. 자주 뵙는 분이 아니니까 언제 어떻게 전해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기막힌 타이밍에 용기를 얻어 시집 한권을 선물했다. 보고 메일을 보낼 때나 결재 서류의 이름으로 만날 때는 여전히 두근두근 마음이 어려워지지만, 서로를 책 친구라고 부르며 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긴장되는 마음을 내려놓고 나는 가장 나다운 내가 된다. 사랑하는 걸 꺼낼 때 사람을 솔직하고 순수해진다.
관심사가 비슷하다면 관계 맺기가 더 쉬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사람만 찾아다닐 게 아니라면 나는 더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아야 한다. 무슨 책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은 무적이 아니다. 나는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고상한 취미로 편 가르기를 하려고 매일 읽는 것이 아니니까. 무엇이든 좋으니 무얼 할 때 즐거운지 알려주세요. 그걸 들으면서 당신을 알고 싶어요. 그 마음이 핵심이라는 걸 기억한다. 이 마음은 책을 읽는 마음 그 자체이기도 하다. 더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 좁은 내 세상에 갇혀 오만해지거나 도태되지 않겠다는 다짐. 사람과 세상을 최대한 오해 없이 읽어내고 싶다는 욕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