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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27. 2024

언니 나 이 책 줘

알밤이와 이모들

나는 언니 때문에 책을 읽었다. 고등학교 때는 열두 살 터울 큰 언니랑 말싸움할 때 한 번만 이기고 싶어서 토론 동아리에 들어갔다. 언니는 논리적으로 따져 묻고 꼬리를 물어 한번을 버벅거린 적이 없었다. 이게 다 늙고 책 많이 읽어서 그런 거야. 억울하긴 한데 말이 나오지 않아 눈물이 차오를 때면 언니 뒤로 쌓인 책들이 원망스러웠다. 그게 언니와 책이 함께 있는 가장 어린 기억이다.


동생이 나이를 먹는 동안에도 봐주지 않고 계속 읽으며 사는 언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언니는 왜 책을 좋아하게 되었냐고. 언니는 답했다. 있지, 대학 졸업하고 내가 바보가 될까 봐 두려웠어. 그다지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한 내가 남들보다 지식이 짧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책을 못 놓겠더라고. 책으로 계속 배우면서 살기로 한 거지. 사회에 나와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걸 들킬까 봐 그래서 무시당할까 봐 겁이 나는 날엔 그 말이 떠올랐다. 뭘 모르겠으면 서점에 가게 되고 답이 없는 날엔 힌트라도 얻으려고 책에 기댔다. 어린 날 보았던 언니처럼 책을 쌓아두고 손 닿는 곳에 책을 두고 살게 되었다.


다 커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우리가 싸울 일은 이제 딱히 없다. 꼬마일 땐 죽을 만큼 미울 때도 많았는데 나쁜 감정도 다 흐릿해졌고 언니가 어이없게 고맙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 동생이랑 기를 쓰고 싸워서 어린 마음을 독하게 만들고 결국 말로 밥 먹고 살게 해 주었으니까. 책이라는 세계에 마음 기대고 사는 게 꽤 효과적이라 고맙고, 계속 배우면서 사는 게 어떤 대단한 젊은 날의 업적보다 낫다는 걸 알게 해 주어 고맙다.


직장 때문에 독립한 후로 본가에 가면 언니 책장부터 가만히 훑는다. 입소문이 들려오는 책은 이미 언니 책상 위에 올라와 있고 독서 모임 사람들이 좋다고 한 책들도 자주 거기 꽂혀 있다. 집에 간 김에 좋은 책을 들춰보는 재미가 있다. 그러다가 정말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무작정 졸라 본다. 이거 나 줘. 빌려줘가 아니라 그냥 줘인 이유는 책에 밑줄도 긋고 낙서도 하면서 읽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은 빌려 간다고 했다가 몇 장 읽고 바로 죽죽 밑줄을 긋고 싶어 져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이거 줘. 문장이 좋아 줄 너무 긋고 싶어. 나 줘. 어디서도 부리지 않는 땡깡을 부렸다. 그런 식으로 빼앗은 책이 아직 그렇게 많지는 않다. 언니도 내가 들고 간 책을 자주 탐낸다. 그거 재밌어? 궁금했는데. 그러면 다 읽고 놓고 갈까, 답한다. 아 근데 내일 독서 모임 책인데? 깔깔 웃다가 으이그 가져가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와 하는 대화가 좋다.


열한 살 터울 둘째 언니는 우리 세 자매 중에 유일하게 남편이 있고 아이도 있다. 조카 알밤이는 큰 언니와 나의 오랜 사랑이다. 세상에 갓 나오자마자 우리 집에 와서 몇 개월을 살았는데 팔뚝만 한 아이를 많이도 안아주고 포동포동 살이 오르는 걸 지켜볼 수 있었다. 아기와 엄마가 몸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작은 언니 집이 근처라 소리 나는 요란한 장난감을 밀고 다니면서 걸음마 떼는 것도 보고 말을 막 뗄 때 대화도 자주 하고 글자 쓰기 시작할 때 우와 우와 박수도 많이 쳤다. 알밤이가 자라면서 큰언니와 나는 카봇과 옥토넛과 티니핑을 많이도 사주었지만 이왕이면 책을 더 많이 주려고 노력한다. 작은 언니가 어느날 장난감은 많은데 이제 책이 필요하겠다 고민을 말해서 큰언니랑 둘이 후기를 뒤져 좋다는 동화책을 엄선해 한 박스를 보내주었다. 책 좋아하는 이모들은 동화책 고르는 것에도 신이 났다.


큰언니는 알밤이가 막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갔다. 나는 이 조그만 애가 혹여 다치면 어쩌나 우다다 뛰어간다거나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나 무서워서 언니나 형부 없이는 산책도 나갈 엄두를 못 냈다. 큰언니는 쌩쌩 추운 날이든 뻘뻘 더운 날이든 말캉한 손을 잡고 어린이 도서관에 갔다. 거기서 공룡 책을 보고 아이가 흥미로워하면 공룡 박물관에도 데리고 갔다. 말을 막 분명하게 하기 시작한 알밤이는 나중에 커서 고고학자가 되겠다고 했다. 그만할 때는 보통 경찰차가 되고 싶다고 할 텐데 책의 힘이었는지 견학의 힘이었는지 의외의 답이 나왔다. 멀리 떨어져 살게 된 막내 이모가 할 수 있는 건 볼 때마다 서점에 데리고 가서 책을 사주는 것이다. 처음엔 언니들이 책을 골랐고 점점 알밤이가 직접 책을 골랐다. 백희나 작가의 작품들과 수박 수영장, 당근 유치원을 지나 최근엔 에그 박사 시리즈로 책이 변해갔다. 내가 물주 같은 이모가 될 때 큰 언니는 동화책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에 가서 아이가 수박 수영장에서 헤엄치게 해 주고 둘째 언니는 달샤베트며 에그 박사 공연을 보여주었다.


순식간에 일곱 살이 된 알밤이는 요즘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한다고 한다. 사실상 엄마들이 번갈아가면서 책을 읽어주는 모임이라는데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고를까 고민하는 언니랑 아기가 귀엽다. 내가 손 붙잡고 서점에 데려가 책을 사주면 그걸 유치원에 들고 갈 생각에 들뜬다. 유치원에 장난감을 들고 오는 건 안되는데 책은 들고 갈 수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가진 것으로 서로 부럽게 만들지 않게 주의하고 같이 읽는 건 권장하는 것이다. 최강자 시리즈나 그리스 로마 신화 대모험 같은 게 요즘 알밤이네 유치원에서 유행하고 있는 게 재밌고 무얼 들고 가서 친구들과 읽지 고민하는 둥그런 뒤통수가 사랑스럽다.


가장 최근에 알밤이가 골라 온 책은 그리스 로마 신화 대모험 신간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다. 카페에 가서 그걸 열어서 같이 보는데 이제 받침이 있는 글자도 수월하게 읽는다. 요새 포켓몬 게임에 빠져 집중력이 많이 약해져서 책에 오래 집중하지는 못했다. 알밤이는 휴대폰을 보고 싶어서 자꾸 심심하다고 했다. 알밤아 심심할 때도 있어야 해, 이모는 심심할 때 이런 나뭇가지도 구경하고 빵도 먹고 그래. 우리 다시 달의 여신 이야기 봐볼까? 회유하니 글밥을 조금 읽다가 그림 위주로 휙휙 넘기는데 오리온이 죽는 장면에서 관심을 갖더니 내게 오리온이 왜 죽었냐고 물었다. 앞에 천천히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모는 알려줄 수 없어. 자꾸 모르겠다고 물어봤지만 꼼꼼히 읽어보라고 나도 고집을 부렸다. 혼자 힘으로 읽지 못할까 봐. 쉽게 살아지는 세상이 아닌데 쉽게 답을 얻다 보면 힘이 없어질까 봐 그랬다.


큰언니가 내게 알려주었던 것처럼 알밤이도 나로 인해 어떤 힘이 생기면 좋겠다. 읽는 재미를 알고 그런 끈기로 이루어내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저 포켓몬 잡는 게 재밌고 자랑일 때에 나 혼자 느끼는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모들 사이에서 같이 읽다 보면 언젠가는 혼자 읽는 것도 즐기고 계속 읽으며 살지 않을까. 오리온이 왜 죽었는지는 앞으로도 절대 알려주지 않을 거다. 알밤이가 크면서 세상에서 재밌는 걸 찾으면 응원할 것이고 집중하는 힘 없이 도파민에 속아 모든 걸 지루해한다면 책을 잔뜩 싸가서 큰 언니랑 아주 신나게 떠들 것이다. 늙어서 할머니가 되도록 눈을 반짝이며 수다를 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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