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니 Oct 30. 2022

여섯 번째 레터. 입이 방정

2022년 7월 21일 (목)

단언 금지 방심 금물 

 굿 모닝,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입니다. 저는 지금 막 런던 에어비엔비에 도착했습니다. 요 며칠 레터에 길 잘 찾는다고 자랑하고 시행착오 즐긴다고 말하자마자 방금 런던에서 기똥차게 길을 잃었습니다. 덕분에 예상보다 한 시간이 더 걸려 11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어요. 3시쯤 먹은 커리 부어스트 이후 아무런 음식도 물도 못 먹어서 잘못된 튜브 탄 걸 알았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시행착오도 배부르고 시간 많을 때나 즐길 수 있었단 걸 알았고요. 길 잘 찾는다고 확신하다가 런던의 복잡한 지하철에서 개고생 했습니다. 앞으로는 단언하지 않겠습니다. 입이 방정이었다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매일 글을 쓰며 여행하다 보니 어제의 저를 정정할 일이 많아지네요. 귀엽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아주 잘못 탄 것은 아니고 플랫폼과 라인은 잘 찾았거든요. 근데 여기도 한국의 1호선처럼 같은 라인이어도 종착지가 서로 다른 방향일 수가 있더라고요. 어느 쪽으로 가는 열차인지 보고 탔어야 하는 걸 '1호선이다!' 하고 잡아 탔다가 인천 가야 하는데 구로 디지털 단지가 나와버리는 상황이었던 거죠. 런던의 지하철 언더그라운드는 대부분의 역에서 플랫폼 바꿀 때 에스컬레이터가 당연히 없어서요. 20킬로짜리 캐리어를 끙끙거리며 들고 돌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습니다. 제 팔뚝은 이 캐리어를 번쩍 들기에는 근육이 하나도 없는 물 팔뚝이라 달리기가 아니라 헬스를 해서 데드 리프트를 좀 당겼어야 했나 생각도 들었고요. 진짜 이건 제 긍정 파워로도 안 되는 허기와 피로였어요. 그렇지만 해내야죠,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우영우를 연기한 박은빈 배우가 한 유명한 말이 막 귓가에 들리면서 아무도 못 알아들으니까 혼자 육성으로 '가야 돼 가야 돼' 중얼거리며 정신줄을 잡았습니다. 자꾸 혼잣말이 많아지죠. 


 안 그래도 2주 내내 혼자 다니면 너무 외로울까 봐 런던 여행의 숙소는 집주인과 함께 쓰는 큰 에어비앤비의 개인실로 잡았는데요. 호텔과 달리 에어비앤비는 보통 현지인들 사는 동네에 있어서요. 역에서 나와 걸어가는데 조용한 주택가에서 제 캐리어 바퀴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요. 호텔로 할 걸 그랬다 후회하면서 딱 도착했는데 와 후회 취소. 여기 제 인생 숙소예요. 커먼 룸도 아주 크고 주방도 있고 여기 묵는 여행자들도 저 말고 여럿 있어요. 들어오면서 여기저기 방 쓰는 애들 마주쳐서 헬로 헬로 하는데 동물의 숲 같아요. 다들 애잔한 눈으로 하우 알 유 해서 암 오케이 암 굿 했는데 완전 안 오케이인 거 다 티 나는지 너 지쳐 보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럴 만도 한 게 베를린 떠나면서 비가 내려서 잔뜩 맞았거든요. 생쥐꼴에 배고픈 사람이 내는 억지 미소는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보나 봐요. 그래도 숙소가 예쁘고 밥은 먹었냐고 먹던 저녁을 나눠주려고 하는 주인 할머니와 반겨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모든 게 잊혀져요. 오늘의 시행착오도 다 좋은 숙소를 만나기 위한 극적 장치이자 운명이었다고 기억을 좀 예쁘게 다듬어버리겠습니다.      


어떤 마무리


 여행을 떠나 오기 얼마 전, 어느 날 저녁에 갑자기 비행기 운항 취소 메일이 온 적이 있어요. 심장이 철렁했죠. 제가 20년도에 비행기 표까지 다 끊어놓고 코로나 때문에 못 간 적이 있어서 또 그런 전개인가 마음이 쿵 내려앉았는데요. 유럽의 대표 저가 항공 라이언에어의 베를린-런던 운항이 취소된 거더라고요. 표를 바꿔주겠다는 안내에 따라 침착하게 시간을 바꾸는데 새벽 6시 아니면 저녁 6시 반 밖에 선택지가 없는 거 있죠. 정말 극단적이죠. 너무 일찍이나 늦게 이동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비싼 점심 즈음의 티켓을 산 거였는데. 새벽 비행기는 사실 공항에 한두 시간 전까지 간다면 제대로 잠을 못 잘 것 같아 고민하다 저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베를린에 머물 시간이 예상보다 네다섯 시간은 늘어났어요.


 전 넉넉해진 오늘의 시간을 새로운 곳에 더 가기보다는 가장 좋았던 곳을 다시 가는 데 썼습니다. 짐을 호텔에 맡기고 아주 아주 친절한 점원과 맛있는 음식이 있던 카페의 강이 바로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맛난 와플을 먹었어요. 다시 왔냐고 아는 체를 해주는 눈빛에 이유 모를 용기가 생기는 느낌이었어요. 눈빛만으로도 용기를 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친구가 그런 사람이었어요. 맛있게 먹고 계산하고 가려는데, 이것 저것 궁금한 눈으로 질문을 하면서 자기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고 서울도 와봤다고 하더라고요. 어버버 대답을 하느라 이름도 못 물어봤네요. 다시 못 보더라도 이름이라도 기억하고 싶은데 말이죠. 이상한 홍삼 주스 같은 커피를 마셨다고 했던 더반 커피에도 다시 갔더니 거기 직원도 또 왔냐고 반겨주었어요. 이번엔 확실히 일반적인 커피 플랫화이트를 시켜 먹었습니다. 서울 커피랑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맛있었어요. 


 한시가 아까운 여행지에서 새로운 곳을 가는 게 아니라 갔던 곳을 다시 가는 게 바보 같은 수도 있단 걸 압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마음 가는 대로 해보니까 이 나름대로 참 좋은 여행 마무리 방법이 되더라고요. 아무리 여러 번 가기 어려운 곳이고 잠시 머무는 곳이라도 정이 드는 장소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걸 한번 더 보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도장 깨기 하러 온 것도 아니고 하나라도 더 가면 이기는 시합도 아니다' 메모를 하고 편안하고 애틋한 마음으로 첫날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해서 필름 카메라를 산 가게를 마지막으로 찾아봤어요. 필름 몇 롤을 더 사서 여행을 이어가려구요. 가게 이름은 모르겠고 분명 이 카페 근처였는데 보이질 않더라고요. 비는 오기 시작하고 공항 갈 시간은 다가왔죠. 베를린 필름 카메라 어쩌구 그다음은 저쩌구로 폭풍 검색을 해서 겨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 나시 원피스를 사서 입는 대신에 야외 사진이 잘 나온다는 조금 비싼 필름을 두 롤 더 샀어요. 옷이나 장신구에는 영 관심이 없어서 구경을 해도 시큰둥했는데 필름 카메라와 필름 네 통 사는데만 순식간에 지갑을 열었네요. 그 핫하다는 미테 지구에서 쇼핑은 필요한 거 외에 하지 않았지만 평생 쓸 수 있는 노란 필름 카메라를 만난 게 제게는 베를린 여행의 최고의 시작과 마무리였습니다.   


라라랜드와 멀티버스 


 제 로망의 도시가 런던이라 이번이 런던에 세 번째 방문하는 건데요. 가만 보니 세 번 다 독일에서 출발하는 라이언에어를 타고 런던 스텐스테드 공항으로 가는 거였어요. 전 그 유명한 히드로 공항은 가본 적이 없습니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출발이었죠. 첫 번째에는 마냥 졸리고 신났었구요. 두 번째는 교환학생 생활을 완전히 끝내고 집에 돌아가기 전 30박 31일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라 이륙과 동시에 여러 감정이 팡 터졌었습니다. 그땐 뭐가 그리 아쉬웠는지 창 밖을 보면서 숨죽여 엉엉 울다가 같은 학교 인터네셔녈 학생으로 온 친구랑 눈 마주쳐서 머쓱했던 기억이 나요. 이번엔 어땠냐면요. 놀랍도록 평온했어요. 크게 아쉽지도 않았고 '참 재밌었지' 하면서 의연하게 떠나왔어요.


 비행기에 일찌감치 앉아 다른 사람들이 다 타기를 기다리면서 라라랜드 플레이리스트를 틀었습니다. 라라랜드는 미국의 상징 LA 할리우드가 배경이지만 출국 수속을 밟다 보니 계속 들리던 독일어가 점차 줄어들고 영어로 디졸브 되면서 오랜만에 라라랜드 노래가 듣고 싶더라고요. 좋아하는 노랠 들으며 비행기가 뜨길 기다리는데 라라랜드 마지막 장면처럼, 제가 이번 여행에서 이렇게 했다면 저렇게 했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최선이었나 평가하는 거 말고 이 하루는 또 어떤 하루가 될 수 있었을까 그려봤어요. 수많은 경우의 수를요. 여러 영화를 짬뽕하는 거긴 하지만 그런 많은 장면들도 다른 지구의 내가 해보지 않았을까 상상해요. 아쉬운 건 멀티버스 속의 내가 대신했을 거다 생각하니까 다시 아무것도 아쉽지가 않네요.


 다시 독일에 온다면 과잉 감성에 취해 다니지 않을까 했는데 떠나는 길에 이리도 밍숭맹숭한 제 마음을 보고 혹시 조금 나이 먹었다고 감각이 무뎌진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어요. 늘 차분한 마음,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기 때문에 어쩌면 거칠고 솔직한 날것의 감정은 덜 느끼도록 발달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참 사소한 것에 즐겁고 또 아쉽거든요. 여러 순간에 울지 않고도 울음이 나고요. 다만 비행기에 앉아 지난 메모들을 쭉 보는데 예전 여행과는 다르게 이번엔 완전히 그 순간 자체를 즐기고 꼭꼭 곱씹었더라고요. 과거나 미래와 비교는 하지 않고 현재만을 온전히 즐겼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무렇지 않다는 걸 알았어요. 저 사실 사연 많은 독일이 아니라 영국 런던에 오는 게 이번 여행의 주목적이었거든요. 뮤지컬 위키드를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보는 게 꿈이어서요. 위키드 넘버 'For good'의 가사를 오늘 계속 흥얼거렸는데 다들 뮤지컬에 관심 없어도 이 가사는 한번 들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뭔가 미련이 커지고 아쉬울 때 이 가사를 떠올리면 다음 단계로 가는 게 조금은 쉬워지더라고요. 앞으로 나아가기에 발이 너무 무거울 땐 'For good', 용기가 필요할 땐 'Defying gravity'를 꼭 들어봐 주세요.  


머나먼 바다로 떠날 항구의 배처럼
바람에 실려 날아갈 씨앗들처럼
이제는 내일로 나아갈 시간

- For good <위키드> 


단절할 결심  


 런던의 지하철을 타면 인터넷이 전혀 터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문이나 책을 읽고 노래 정도만 들으면서 멍하니 있습니다. 저도 유럽에 있을 때는 데이터를 팡팡 쓸 수 없어서 길을 찾을 때 빼고는 거의 인터넷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있어요. 그렇지만 와이파이가 낭낭히 연결되는 순간엔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눌러버리곤 합니다. 반자동적인 무의식의 행동에 흠칫 놀라 되도록이면 바로 꺼버려서 최근 일주일 인스타그램은 10분도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메일 레터 신청 모집에서 약속했듯이 이 편지 외에는 여행 관련 글을 전혀 쓰지 않고 있어요. 스토리에 기억할만한 걸 잔뜩 올리는 것도 재미지만 제 것을 보여주려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잔뜩 들어야 하는 게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을 가지고 싶었던 제겐 방해 같이 느껴지더라고요. 또 전 자랑하려고 사진이나 글을 올리는 게 아닌데도 자랑이 되고야 마는 구조도 맘이 편하지 않아 이런 레터를 고안한 것이기도 해요. 런던의 지하철이 시대에 맞지 않게 모든 신호와 차단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조금이나마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제가 이렇게 매일 할 말이 많아 잠을 미루는 것도 어떤 교란도 없이 단절되어 혼자가 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충분했어서 할 말이 많이 생기는 거죠. 


 사실 베를린에서 외롭다 느꼈을 때 연락해서 만나자고 제안해볼 고등학교, 대학교 후배들이 몇 있었습니다. 유랑이라는 카페에서 동행을 구할 수도 있었고요. 실제로 어떤 날에 강변에 혼자 앉아 있었는데 '혹시 유랑이세요?' 하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 만남이 재밌다는 걸 잘 알지만요, 이번만큼은 제가 저로만 존재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외로움을 꿀꺽 삼키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회사에서의 나, 가족 안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의 나를 모두 사랑하고 인정하지만 솔직히 어떤 때는 함께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느라 쉽게 지쳐버리는 날도 있었습니다. 한 번쯤은 오래오래 그냥 나로만 있어보고 싶었고 그런 경험을 하길 잘했다 생각합니다. 연결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단절이 답도 아니지만 우린 때때로 수많은 것들과 지나치게 연결되어 있기도 하니 의도적인 고립의 시간을 만드는 것도 건강한 정신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원한 단절이 아니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심이었겠지요.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에 비참하지 않은 건강한 고립을 즐기는 중입니다. 


먼길을 이동한 날은 한 것도 없는데 물에 젖은 듯 몸이 무겁고 진이 다 빠집니다.(실제로 오늘은 비에 젖었습니다) 내일은 성실하게 일어나 나가지 말고 늦잠을 좀 잘까 합니다. 그래야 나아가는 길이 가뿐할 테니까요. 런던은 시차가 한 시간 더 있어서 오늘도 한 시간을 더 벌어 살았습니다. 시차와 늦은 숙소 도착 때문에 한국 시간으로는 레터가 평소보다 좀 더 늦게 도착하겠군요. 저는 무사하고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너무 졸립습니다. 깊은 잠을 자고 가뿐한 하루를 맞아보겠습니다. 벌써 금요일이네요. 오늘도 이 레터가 조금이나마 힘이 되길 빌어봅니다. :)    


[오늘의 질문] 


- 여행지에서 갔던 곳을 다시 가본 적 있나요? 

- 기억에 남는 여행의 마지막 날이 있나요?

- 여행할 때 어떤 걸 쇼핑하는 편이세요? 따로 모으는 기념품이 있나요? 

  (저는 엽서를 모으고 예전엔 핀을 모았어요.) 

- 미련이 생기는 일을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이 있다면?

- 단절되고 싶은 대상이 있는지, 단절의 시간을 가져본 적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전 06화 다섯 번째 레터. 운명을 믿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