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2일 (금)
오늘의 런던과 아주 잘 어울렸던 플레이리스트
https://youtu.be/V8NZ9v7eTzY
여행지에서는 아무리 피곤해도 아침에 눈이 번쩍 떠집니다. 어젯밤 새벽 4시까지 레터를 보내고 늦잠을 자겠다고 선언을 했지만 평소같이 일어나버렸습니다. 눈은 떠졌지만 피로는 다 풀리지 못해 뒹굴뒹굴 지도로 먼저 런던을 한참 살피고서야 본격 여행을 시작했어요. 문을 나서자마자 쌀쌀한 기운이 확 끼쳐 손에 들고 나온 외투를 바로 껴입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독일이나 영국이나 서로 달라붙어있는 정도로 가까운 느낌인데도 시차도 있고 거긴 정수리 타게 덥다가 여긴 갑자기 가을 같이 확 추워서 놀랐습니다. '넌 지금 다른 나라에 왔다'라고 날씨가 알려주는 듯했죠.
저 런던에 오면 해야 할 게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요.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빅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4년 전 꿈에 그리던 런던에 처음 왔을 때 빅벤은 보수 공사 중이었고 시계만 빼고 모두 꽁꽁 가려져 있었습니다. 제가 로망을 키우게 된 모든 영국 문화의 레퍼런스에는 빅벤이 나오기 때문에 철골 구조물로 빈틈없이 가려진 그 모습이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붕대 감은 모양의 빅벤과 함께 영상을 찍으며 '저 구조물이 벗겨지고 온전해지면 다시 오겠다'라고 말했는데 오늘 정말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나오자마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빅벤이 확 보여서 놀랐습니다. 또 그걸 보러 온 사람들이 예전만큼, 어쩌면 조금 더 많은 점도 놀라웠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예전 그대로라 흑백에 뻣뻣하게 굳어있던 제 인식 속의 세상이 다시 알록달록 와글바글 돌아가는 거 같았습니다. 야바위로 관광객 돈 빼앗는 꾼들과 장미를 눈앞에 들이밀고 판매하는 사람, 풍선을 파는 사람, 엉성한 티셔츠나 자석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까지 더 복잡스러워진 것 같기도 합니다. 이렇게나 관광지스럽다니 영화 속 장면 같다 생각하는데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하고 무지개 색 뽀글 가발을 쓰고 흰 천으로 된 옷을 뒤집어 입은, 풍선 파는 사람의 표정이 묘사하기 힘들 만큼 깊게 지친 얼굴인 걸 보고 이건 환상 같아 보이지만 현실이 맞구나 생각했습니다. 여기선 코로나와 소매치기 때문에 사람이 북적이면 긴장부터 되는지라 런던 아이 쪽으로 빠르게 건너가 강변에 앉았습니다. 처음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곳이 명당인지 알았던 거죠. 거기 앉아 마스크를 벗은 빅벤과 국회의사당 건물을 한눈에 담고 오래오래 봤습니다. (빅벤 왼쪽에 이어지는 게 국회의사당입니다.)
사람들을 벗어나니 조금 여유를 가지고 빅벤이 어떻게 생겼는지 찬찬히 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네모진 무언가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금장이 있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나고 또 시계 쪽은 푸른빛이 나는구나. 뾰족한 윗부분이 국회의사당 쪽과 잘 어울리는구나. 참 곱게 빛바랜 색이다. 저 건물만 보면 몇 년도인지 잘 모르겠다. 90년이라고 해도 되고 05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생각하며 조금씩 조금씩 눈으로 만져봤습니다.
그러고 있으니 문득 '다시 보러 오겠다'고 말한 곳을 이렇게 진짜 다시 오고, 지난해 사랑에 빠져버린 뮤지컬을 웨스트엔드 오리지널 극장에서 보겠다고 정말 이 먼 곳까지 온 제가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하겠다고 말하면 끝끝내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죠. 무엇이든, 그게 세계를 하루 꼬박 날아 홀로 모험하는 것이든, 매일 같이 글을 쓰는 일이든. 다. 생각하는 건 다. 결국은 이루고 해내는 나이지 않을까 작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멋진 랜드마크를 보고 감격에 겨워 의미부여를 과하게 했대도 이렇게 용기가 나는 순간은 간직할 가치가 있으니 그 맘을 그대로 수첩에 적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고 싶다', '배우고 싶다', '가고 싶다', '먹고 싶다' 등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소망을 갖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고 적었습니다. 얼마나 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니 어느 날의 내가 끝끝내 이룰 것을 믿고 실컷 꿈꾸고 바라며 살자구요.
지난 유럽 여행에서 반절을 채우고 남은 반절이 비어 있는 수첩을 들고 왔는데요. 아무래도 혼자 여행하다 보니 빈 종이가 순식간에 채워져 이제 서 너 장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런던에서 산 수첩이니까 여기서 다시 살 수 있겠지 생각하며 오늘은 서점 투어를 하기로 했어요. 서점을 워낙 좋아하니 겸사겸사요. 지난번엔 던트 북스밖에 가보지 못해서, 런던 리뷰 북스 외 특색 있는 서점들을 가능한 많이 가는 게 오늘의 계획이었습니다.
이 수첩이 첫 여행에서 호스텔을 찾아가다가 발견한 서점에서 우연히 산 거기 때문에 위치가 어디인지 서점 이름은 뭔지도 몰랐어요. 가물가물 W가 크게 로고였던 게 기억이 나서 Waterstones라는 체인 서점인 걸 알아냈고요. 가까이 있는 지점부터 들려보기 시작했습니다. 걸어가다가 보이면 일단 들어가서 다 확인해봤어요. 어떤 지점에는 책만 많고 수첩 같은 굿즈는 거의 없어서 금방 나왔고, Stanfords라고 지도를 컨셉으로 관련된 책과 온갖 물건들을 파는 서점에 가서도 온 직원들에게 이런 거 있냐고 물어봤어요. 거기도 없길래 예전에 샀던 바로 그곳을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길을 잘 외워서, 한 번 가면 몇 년이 지나도 어느 근처였다 어떤 골목 다음이다 정도는 기억을 합니다. 이번에도 호스텔 근처에 어떤 쪽이다를 기억해내서 정확히 그 서점을 찾아갔습니다. 셜록처럼 추리를 하면서 런던 거리를 걸었죠. 근데 분명 그 서점인데 벽에 걸려있던 에코백과 노트들이 전부 다 바뀌어 있더라고요. 완전 똑같은 건 없어도 비슷한 것만 구해도 영광이다 했는데 비슷한 것도 없었어요. 아쉬움에 온 구석구석 다 둘러보고 직원에게 물어보니 한 직원이 이 물건을 기억하더라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팔았는데 이제는 다시 만들지 않고 재고도 없대요. 이걸 여기서 팔았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서 반가운 동시에 어떤 아쉬움이 밀려왔습니다. 런던은 다 그대로라서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런 식으로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느끼게 되네요. 괜히 못 산다고 하니까 더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이렇게 소중한 물건이 될 줄 알았으면, 다시 찾을 수 없는 물건인 줄 알았으면 한 열 개 사둘 걸 그랬죠. 이런 두꺼운 공책은 다 못 채운다고 오른쪽 면에만 종이를 낭비하면서 기록을 이어나가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그 직원 분이 피카딜리 쪽 지점은 더 크고 재고가 많은 곳이라 있을 수도 있다고 가보라고 해서요. 떠나기 전에 꼭 가보려고 합니다. 비슷한 거라도 꼭 사서 새로운 장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더웠다 추웠다 하고 어제 맞은 비가 피로감을 더했는지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친절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 재밌는 책이 있어서 괜찮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특히 어제 쫄쫄 굶은 경험으로 허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되어 맛집이고 뭐고 밥을 잘 챙겨 먹는데요. 대충 들어간 곳도 다 맛있었으니 오늘도 행운이 계속 따라준 것이지요. 특히 저는 배고픔을 넘어선 허기를 느낄 때면 햄버거를 먹곤 하는데 러셀 스퀘어 근처 GBK 버거집에서 든든한 버거를 먹어서 아직까지 배가 부릅니다. 속세를 떠나온 중이 된 양 현지에서 즐길 수 있는 걸 위주로 즐기자, 핸드폰을 볼 바엔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자 했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너무 보고 싶어서 빵빵한 와이파이에 우영우 조금 보면서 햄버거 먹었더니 행복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내일은 드디어 <위키드>를 보는 날입니다. 컨디션 회복을 위해 오늘은 조금 짧게 편지를 마무리해야겠어요. 레터를 잘 쓰고 싶은데 짧은 시간 동안 쓰다 보니 몇 번을 검수하는데도 오타가 있고 비문이 있고 하네요. 완벽주의가 또 빼꼼 고개를 내밀려고 하지만 끝까지 즐길 수 있게 편한 마음으로 계속 편지하겠습니다. 벌써 7일, 반이나 왔네요. 이걸 기다리는 분들도 있다고 믿으면서 오늘도 열심히 적어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오늘의 질문]
- 크던 작던 무심코 말한 것을 끝내 해낸 경험이 있나요?
- 소중한 물건이 무엇인가요?
- 허기를 느낄 때 유독 생각나는 음식이 있나요?
- 런던에 온다면 무엇부터 하고 싶으세요?
- 다시 찾아가겠다고 다짐한 여행지가 있나요?
RE: [나니의 빨간수첩] 7. 마스크를 벗은 빅벤
2022년 7월 24일 19:08
- from D
안녕하세요:) 저번에 이어 이번에도 답장을 보내봅니다!!
저는 사실 목요일에 이스탄불로 출국을 해서 지금은 산토리니를 향해 가고 있는 배 안에 있어요. 중학생 때 처음 배웠던 세계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터키의 이스탄불을 동서양이 융합된 도시라고 설명하셨었는데 그때부터 터키에 꽂혀서 드디어 오게 됐어요. 오는 김에 그리스도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비효율적인 동선이지만 그리스를 거쳐 다시 터키로 돌아가는 일정을 짰는데, 그리스가 생각보다 너무 예뻐서 안 오면 큰일 날뻔했지 뭐예요!
답장인데 제 얘기만 너무 길었네요.
저는 셜록이며 해리포터며 정말 재밌게 봤지만 이상하게 그것 때문에 런던이 끌리지는 않아요. 굉장히 디테일한 런던 로망이 있는데, 겨울의 런던에 코트를 입고 거리를 걸어 다니다가 ‘포트넘 앤 메이슨’이라는 홍차 브랜드 본점을 가는 거예요! 마침 눈이 딱 내려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사실 그 브랜드가 최애 홍차 브랜드는 아니지만.. 괜히 영국에서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 런던 가기 전까지는 마시는 걸 좀 더 참아보려고 합니다ㅋㅋㅋ
저도 나니 님의 여행 다이어리처럼 이번 여행에서 무지 노트를 하나 사볼 생각이에요! 그림을 그릴지 글을 쓸지는 몰라도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대로 기록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
다음 레터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