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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니 Oct 30. 2022

네 번째 레터. 걱정 없는 궁전

2022년 7월 19일 (화)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안녕하세요, 오늘은 베를린에 폭염 주의보가 내린 날입니다. 왜 전 꼭 이런 걸 밖에 나가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더위에 훌렁 벗고 다니는데 누가 유교걸 아니랄까 봐 저만 점잖게 입고 긴팔까지 챙겼어요. 여기선 뭘 입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저도 푹 파진 나시 원피스 하나 사서 입어볼까요. 한국은 날씨가 어떤가요? 거기도 많이 더워서 힘드시겠지요. 


 뭘 할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 마음은 어제로 딱 끝이 났고 오늘은 그 시간 여유가 자유 이용권 같이 느껴져 콧노래가 나왔습니다. 이제 혼자 밥 먹는 것도 익숙해져서 눈치도 안 보고 적당한 맛집들 잘 가보고 있어요. (밥 잘 먹으라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먹는 속도가 엄청 느려서 새로운 사람이랑 밥 먹으면 거의 반도 못 먹고요. 잘 아는 사람이라도 대충 먹고 다 먹었다고 하는 편인데 지금은 혼자니까 그냥 먹고 싶은 만큼 우물우물 다 먹고 있습니다. 무적의 9유로 티켓으로 근교 도시를 가볼까 고민하면서 바나나 팬케이크를 먹었어요. 정말 맛있고 점원 분들도 친절해서 하루의 시작이 좋았죠.


 원래는 드레스덴에 가보자 하고 앞사람 따라서 역으로 들어가는 느낌의 어떤 계단을 올라갔는데요. 포츠담 가는 S반이 딱 대기 중이더라고요. 그게 운명 같아서 그냥 타버렸어요. 뭐 드레스덴은 아쉬우면 내일이라도 가자 생각하면서요. S반은 한국의 지상 전철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포츠담은 베를린 오는 사람들이 많이들 가는 근교 도시입니다. 거기에 있는 '상수시 궁전'이 유명하다더라고요. '상수시?' 이름이 왜 저런가 생각했고요. 어제 대충 구글맵으로 봤는데 저는 그런 궁전이나 박물관 같은 데는 좋아하지 않아서 드레스덴을 가려고 한 거였거든요. 한적한 S반에 올라타서 출발하고 머리 위 창문에서 자연 바람이 솔솔 불 때 이미 오늘 하루는 끝났다 싶었어요. 제 두 다리만으로는 볼 수 없는 베를린을 굽이져 가는 전철을 타고 구석구석 볼 수 있었고요. 바로 옆엔 제 또래의 독일인 세 명이 제가 끌고 온 짐 보다 더 큰 배낭과 캐리어를 끌고 어딘가 가고 있더라고요. 비장해 보이기도 신나 보이기도 한 그 얼굴들을 보고 있으니까 저도 막 삶이 재밌는 거예요. 9유로 티켓 덕에 독일 사람들도 국내 여행을 많이 하나 봅니다. '원하는 만큼 어디든 어떤 방법으로든 가보세요' 하는 티켓이라니. 제 인생에 이런 티켓이 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브런치 맛집 Zimt & Zucker
https://goo.gl/maps/oyZ8vY9uukvMP2hb7

 저는 본격 교환학생 시작 전에 독일어 인텐시브 코스 초급반을 한 달 동안 주 5회 4시간 씩인가 들었었는데요. 지금은 화장실 어딘가요, 이건 얼마인가요, 대박 감사합니다 정도만 기억이 납니다. 그때 알파벳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는데 정말 인텐시브였던 게 선생님이 독일어를 독일어로 알려주셨어요. 쌩 기초반을.. 그래서 제가 발달된 것 하나는 눈치로 독일 사람들이 무슨 말하는지 때려 맞추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옆에 앉은 세 명의 독일 친구들이 제가 예전에 살던 '니더작센 주'에 대해 말하는 게 갑자기 확 들리는 거예요. 대충 눈치가 '야 니더작센은 어디냐? 나 들어본 적도 없다'하는 느낌이었는데, 제가 일어나서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러다 구글링 했는지 '그 브레멘 있는 곳이구나' 하는 걸 듣고 기억이 새록새록 나면서 이 기차를 타고 그냥 쭉 가서 올덴부르크에 내렸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멀긴 하지만 그렇게 무모한 짓일까 하고요. 진짜 멀어서 9유로 티켓으로는 며칠 잡고 찔끔찔끔 근교로만 움직여야 해서요. 정말 다시 가보려면 왕복 20만 원 정도 비용이 드네요. 마음은 가보고 싶은데 시간도 돈도 꽤 크고, 그리운 곳을 다시 가는 게 과연 괜찮은 선택일까 고민이 됩니다. 이제 독일은 내일만 온전히 하루 머물고 다음날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데요. 저는 내일을 과연 어떻게 보내게 될까요.        


(9유로 티켓은 도시 간 기차의 경우 ICE 같은 고속 열차 빼고 사용 가능합니다. 찾아보니 외곽 도시에서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 근교 연결까지 사용 가능하대요!) 


18세기 왕도 결국은  


 서울의 6호선 상수역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국어로 무슨 도시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한 이름. 알고 보니 '상수시 Sanssouci'는 프랑스어로 '걱정이 없는'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프로이센의 왕 프레드릭 2세의 여름 궁전이었다는데 만든 이유가 좀 정겨워요. 왕이자 전사였던 그가 부담과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해서 만든 곳이래요. 그렇다고 뭐 환락을 즐기고 이런 게 아니라 자기 취향 그림 모으고, 건축 스타일 구상하고, 철학자들 불러서 먹고 마신 공간이라니 우리가 자취방에서 하는 거랑 비슷하잖아요.  


 이 궁전이 좋았던 게 입장권을 사면 기본으로 도슨트가 제공되더라고요. 모두가 귀에 도슨트를 대고 요리조리 보는 게 귀여웠어요. 특히 여러 방 중에서 도시 전경 그림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 있었는데요. 설명을 들어보니까 프레드릭은 그곳들 중 한 곳도 가본 적이 없대요. 그런데도 그렇게 잔뜩 모은 거라니 좀 놀랐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마 건축 양식 참고한다고 모았다고 한 거 같아요. 하지만 정말 그게 다였을까 싶고요. 그림이 유난히 세심하고 사진 같아서 빤히 보았는데요. 그때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장면을, 계속 보고 싶은 곳을 그렇게 솜씨 좋은 화가를 통해 최대한 작은 부분까지 그려야만 겨우 간직할 수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좀 더 애틋하게 보였어요. 저는 지금 사진도 핸드폰이며 필름 카메라며 동원해가며 찍고 고프로로 동영상도 찍고 있거든요. 저처럼 어떤 순간을 잊어버리는 게 싫은 사람이 18세기에도 한 명쯤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어떻게 기록을 했을지 상상해보며 다른 방 보다 조금 더 머물렀습니다. 저 그림들은 내가 엽서 있으면 종류별로 산다 다짐했는데 막상 기프트 샵엔 요상한 주머니랑 부채 같은 거만 팔아서 진심으로 섭섭했어요. 


안전하다 느끼는 순간

 

 사실 베를린에서 평화롭게 다니다가 포츠담 역 도착하자마자 주요 부위만 겨우 가린 나체의 노숙인을 마주쳐 후다닥 다른 출구로 나가고, 베를린 보다 화가 나 보이는 사람이 많은 느낌이라 살짝 쫄았었거든요. 폭염까지 겹쳐서 어제와 달리 걷기가 참 싫은 하루였어요. 그래서 상수시에서도 궁전이 보이는 벤치에서만 한참 앉아서 놀고 좀 일찍 나와서 다른 명소를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요. 걷기 싫어서 내려야 할 역에서 안 내리고 종점까지 갔답니다. 근데 그게 은근 또 재밌는 거예요. 버스 자유 이용권이 있으니까 그냥 아무 버스나 잡아 타고 구경하자 싶어서 올라탄 버스가 종점에 다다를 때쯤 '포츠담 대학교' 정류장이 나오더라고요. 궁금함에 내려봤습니다. 


 상수시 궁전이 있는 상수시 공원에는 뉴 궁전이며 별채, 갤러리 등등 아주 많은 건물이 더 있는데, 포츠담 대학교 캠퍼스가 거기 있더라고요. 이게 어떻게 학교일 수가 있는 건지 믿기 어려운 건물에 진짜 학생들이 있더라고요. 독일도 지금은 방학이라 학생이 많지는 않았어요. 고요한 학교를 산책하다 저도 어떤 신전 같은 건물 계단에 학생인 척 앉아서 슈퍼에서 산 물도 마시고 수첩에 끄적이다가 책도 좀 읽었어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는 게 아까워서 맨 귀로 고요함을 들으면서요. 그 순간 그곳에서 제가 정말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 매일 다니는 길이 갑자기 숨 막히게 무서워질 때도 있었고 아름답던 세상이 한순간에 위험하게 느껴지는 날도 많았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먼 나라의 조용한 학교에서 제가 안전하다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게 신기했어요. 제 앞에서 갑자기 한 여섯 명이 준비 체조를 하다 겨루기? 호신술? 같은 걸 하고 있었고 여러 사람들이 평온한 얼굴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책방에 자주 가는 이유도 그곳은 안전한 기분이 들어서인데요. 오늘 우연히 찾아간 포츠담 대학교에서 비슷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숲 속을 헤쳐 버스 정류장을 찾아야 했는데 두려움이 하나도 끼지 않은 상태라 막 작사 작곡을 하면서 노래를 크게 부르며 걸었습니다.  


끝인 줄도 모르고 


 제가 밥 잘 먹는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저 저녁엔 인생 라구 파스타를 먹었어요. 대충 별점 높고 사진 괜찮은 곳 온 건데 바로 앞에 포츠담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있는 거예요. 완전 럭키! 아름다운 광장을 보면서 손가락에 따봉이 절로 쥐어지는 파스타를 한 그릇 했어요. 물론 계산할 때 현금 부족한데 카드 안된다고 해서 세상 당황했지만 다시 해보니 잘 되어서 설거지는 면했습니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서 독일 슈퍼 REWE 레베에 가서 물을 사 가지고 좀 앉아있다 가려고 했는데요. 시원한 게 탄산수만 있길래 베를리너 맥주를 샀습니다. 벤치에 앉아서 틴트로 병뚜껑 시원하게 따서 마시는데 하루가 참 짧았던 느낌이더라고요. (제 특기 하나 더, 저는 딱딱한 거 있으면 병뚜껑 다 딸 수 있어요)


 노을이 지기 시작해서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나 가려는데, 순간 마음이 울렁거리는 거 있죠. 베를린은 내일도 있을 거니까 아쉽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포츠담은 떠나려니까 인생에 마지막인 것 같은 기분에 순간 슬퍼지는 거예요. 어쩌면 여기가 소도시라서, 제 마음의 고향 올덴부르크와 참 닮아서 더 그랬나 봐요. 언젠가 다시 올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일 확률이 크잖아요. 전 왜 이렇게 아쉬운 게 많은 인간인 걸까요. 우리가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영영 다신 보지 못할 사람을 보내고 가지 못하는 곳을 떠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자주 생각하거든요. 그런 생각이 있어서 제가 매번 이번이 마지막인 것처럼 아쉬워하는가 봅니다. 


제가 보낸 사진을 여러 번 계속 계속 본다는 분이 있어서요. 사진을 조금 더 넣어봤어요. 저도 이렇게 메일함을 열어보는 게 설레기는 처음이에요. 의미 있는 여행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걱정 없는 궁전' 이야기를 듣고 오늘의 걱정이 사라지시면 좋겠네요. 그랬으면 좋겠어서 뜻을 알게 되자마자 적어두었어요. 꼭 제목으로 써야겠다, 꼭 말해줘야겠다 하고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저도 걱정 없이 잘 자겠습니다.  


포츠담 맛집 Assaggi
https://goo.gl/maps/ReCbiL3yXFsYCVtW6

[오늘의 질문] 


- 지금 독일처럼 모든 교통수단이 무제한 이용 가능하다면 어디를 어떻게 가보고 싶으세요? 

- 걱정 없는 궁전에 내려놓고 싶은 요즘의 걱정은?

-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시나요?  

- '이것만은 잊어버리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세요? 



RE: [나니의 빨간수첩] 4. 걱정 없는 궁전

2022년 7월 20일 15:53 

- from A 


Liebe! 나니! 

Guten Abend~~ 나니가 독일에 있으니까 독일어로 한번 시작해봤어! 이렇게 메일을 기다리는 건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 잠에 들기 전에 꼭 한 번씩 메일함에 들어가서 확인하고 자. 나니의 빨간수첩이 왔을까 하고 히히 VIP로 지정해둬서 알람이 오는데도 자꾸만 들어가 알람보다 먼저 확인하려는 나의 마음 알아주랏.

이곳도 덥긴 하지만 폭염주의보는 아니야!! 쉬엄쉬엄 다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 여기는 매미가 울기 시작했어. 일요일인가 월요일부터 울었는데 정말로 여름이 온 것만 같아서 참 좋아. 아 안 좋은 점도 있어 아침마다 까치가 매미 먹으려고 엄청 싸워! 일찍 일어나서 매미 먹는 까치 때문에 나도 일찍 일어나... 좋은 걸까..? ㅋㅋㅋㅋㅋ


눈앞에 있는 열차를 타고 목적지와 다른 곳에 가는 나니가 부러워 요즘 나는 어딘가 가는 게 조금은 두렵거든  그래서 새로운 경험과 혼자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나니를 보면서 위로를 받아. 나니의 경험을 비록 글로 사진으로만 느꼈지만 꼭 러 담은 마음이 나에게 큰 용기를 줘. 고마워 나니야 나 정말 나니한테 큰 도움받고 있어 나중에 내가 갚을 기회 꼭 줘야 해!! 


걱정이 없는 궁전 그곳에서 정말 꼼지락 사부작 하면서 이것저것 했을 걸 생각하니까 귀여워. 안전한 마음이 드는 곳이라니 그곳을 만나려고 나니가 눈앞에 있는 열차를 타고 포츠담으로 갔나 봐. 너무 행복했을 것 같아 ㅠㅠ 해 지는 거리 사진을 보니까 몽글몽글하고 저곳에서 같이 맥주 마시고 싶어 다음에 나와 함께 독일에 가줘요 가서 함께 거닐면서 맥주 마셔줘!!!!!!!!!! 인생 라구 파스타 집도 데려가 줘!


아 메일에 넣어 준 사진들 속 나니가 있어서 정말 정말 반가웠어!! 읽으면서 앗 나니다! 하고 속으로 외쳤지 뭐야 크크크 첫 번째 사진 속 정원 가운데 있으면 정수리 타겠다 싶을 정도로 햇빛이 너무 뜨거워 보이는데 풍경이 너무 좋다. 아파트 단지에서 분수를 틀어서 그 소리 들으면서 보니까 꼭 영상 같고 그래 막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사진을 보고 있어 ㅎㅎ 더우니까 민소매 나시 한번 입어줘 훌렁훌렁 시원한 옷 입고 독일의 여름 햇볕을 만끽해줘! 


Danke 나니, 오늘도 다정한 여행 하길 바랄게 

- 지금 독일처럼 모든 교통수단이 무제한 이용 가능하다면 어디를 어떻게 가보고 싶으세요? 

정말 모든 교통수단이 무제한 이용이라면,,, 전국일주 하고 싶어요. 인천부터 기차 타고 서해 돌고 기차 타고 남해, 동해 돌고 독도 가서 태극기 휘날리고 오고 싶어요!!! 

- 걱정 없는 궁전에 내려놓고 싶은 요즘의 걱정은?

미래에 대한 걱정..? 뭐해 먹고살지 어떻게 살지. 걱정 없는 궁전에 내려놓고 싶어요 

- 압박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시나요?  

듣고 싶은 노래를 들으며 방 정리를 하면서 생각 정리를 해요. 그러다 보면 다시 책상 앞에 앉을 마음이 생겨요. 쓰다 보니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ㅎㅎ

- 이것만은 잊어버리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있으세요? 

혼자 했던 여행의 순간들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처음으로 혼자 타 본 비행기, 혼자 가본 낯선 도시에서의 느꼈던 것들은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나니님에게

2022년 7월 21일 03:06 

- from Y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이제 숙소에 도착하시지 않았을까 싶네요.

요 며칠 저의 하루는 나니님 덕분에 옛날 감성을 제대로 만끽하는 중이에요.

누군가의 편지를 기다리는 일은 생각보다 더 두근거리는 일이었네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나쁜 일이 있었다면 피곤과 함께 날려 보내시고, 좋은 일이 있었다면 추억과 함께 간직하시길 바랄게요. 

PDF로 답장을 드리는데, 혹시 몰라 같은 내용으로 아래에 첨부할게요.

마찬가지로 저의 이야기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길을 엄청 잘 찾는다니, 엄청난 재능이에요. 저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모두 리셋되는 거 있죠. 그래서 주변 건물과 상점 이름을 모조리 외우고 다녀요. ‘아 이 가게는 아까 내 왼쪽에 있었지.’ 이래야만 길을 잃지 않는답니다. 여행은 내려놓을 때 즐거워진다는 말에 아주 공감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여행은 약간 어설퍼야 제맛이더라고요. 삶을 지켜내는 방법이 노을을 보는 것이라니, 낭만적이에요. 저에게 있어서 삶을 지켜내는 방식은 무작정 될 때까지 하는 것인 거 같아요. 자존감과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져도 그 상태에서 그래도 해낸다면, 결국 그 과정에서 자존감과 자신감이 다시금 회복되더라고요. 모순적이지만요. 그런데 나니 님의 글을 읽고 다른 방법도 한 번 찾아볼까 하는 마음이 드네요. 


가끔 배웠던 외국어 단어나 문장이 귀에 쏙- 들어오면 괜스레 반갑지 않나요? 그들에게 집중하게 되고 뭔가 신기하면서 뿌듯한 감정. 저만 그런가요 ㅎㅎ 여행에서 자꾸 아쉬운 기분이 들고 마지막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싶어요. 지금의 ‘내’가 보는 풍경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거니까 더 아련한 거 같아요. 그래서 이 감정을 두고두고 느끼고 싶은데 또 그게 안된다는 걸 아니까 아쉬운 게 아닐까요? 물론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니 님의 말에 백 번 천 번 공감합니다. 


외로운 감정이 있을 때면 그냥 그 자체를 즐겨버려요. 마음 한켠이 공허할 때, 오히려 이성적인 상태가 되어 무언가를 하게 되고 할 거리를 찾게 돼요. 외로워질 땐 ‘아, 무모한 도전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지금이 기회야’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집 밖으로 나가 커피도 마시고 괜히 힘차게 걸어보고 그간 용기가 나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채워지는 기분이 나거든요. 


4년 전의 저는 어떤 모임에 나가는 것도 처음 보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싫어했어요. ‘낯선’이라는 단어가 주는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거든요. 현재의 저는 모임을 4개나 하고 있고 대외활동도 여러 개 하며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 잔도 하고 나름 발전한 사람이 되었어요. 여전히 낯가림은 심하지만,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하고 쭈굴쭈굴한 자신을 이겨내려는 노력 중에 있어요. 어떻게 당연한 사회의 흐름이겠지만 이렇게 변한 제 자신이 가끔 신기하기도 하답니다. 


제주도에 혼자 여행 갔을 때,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런지 자꾸 새벽이면 자동으로 눈이 떠지더라고요. 대충 옷 걸쳐 입고 아무 생각 없이 숙소 앞바다로 갔는데 윤슬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영원히 잊지 못할 거 같았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호다닥 숙소로 올라가서 필름 카메라로 한 컷 남겨두기도 했어요. 드넓은 바다 앞에서 혼자 이 광경을 보는 게 왠지 온 마음을 뜨듯-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었요. 뭘 해도 잘 될 거 같아서 은근 힘이 났었죠. 전 그날을 잊고 싶지가 않네요. 


이제 독일도 저녁이네요. 저는 서너 시간 뒤에 일어나서 나니 님의 메일을 받았을지, 아님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원래 일어난 직후 메일을 확인하는 건 루트에 없었는데, 요 며칠만 눈 뜨자마자 메일을 확인해요. 왔으면 반갑고 설레고, 아직 오지 않았다면 오늘은 언제쯤 올까- 궁금증을 가지며 하루를 시작해요. 그리고 꼭 자기 전에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고 날을 보낸답니다. 자기 전에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꼭 그전에 읽거든요. 


나니 님의 하루는 또 어땠을지 궁금하네요. 남의 일상 듣는 즐거움을 한 번 더 깨달아버렸네요. 감사해요. 안녕히 주무시고 기분 좋은 밤 되시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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