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영혼을 위해
"지루한 장마와 찜통더위도 물러간 지금 바라는 것은 튼튼한 신체와 명랑한 마음가짐이다. 이 생명의 바탕 위에 희망이 솟고 거칠은 세파에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 희망을 갖고 계획에 의한 생활을 꾸준히 꾸준히 해나가도록. 그리고 불안 공포 우울 억지로부터 빠져 나가라. 항상 든든한 믿음을 갖고 튼튼하고 명랑하기 위해 노력하라."
아버지가 보낸 빛 바랜 편지 속 글귀는 늘 마음을 울린다. 평소에는 무심한 듯 과묵한 편이셨지만 멀리 떨어져 지내는 딸에게 가끔 편지로 응원을 보내왔다. 헤쳐 나갈 세상이 망망대해처럼 아득해도 꾹꾹 눌러 쓴 아버지의 손글씨에서 묻어나는 애정은 험한 세상을 건너갈 돛단배가 되어주었다.
불현듯 13년 전 다녀온 일본 시코쿠 섬 불교 순례길을 걸을 때 '동행이인'을 읊조리며 자신을 다졌던 여름날들이 소환되었다. 인적이 드문 호젓한 숲길을 혼자 걷다보면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에도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온몸의 세포를 곤두세운 채 다가오는 인기척이 순례자임이 확인될 때까지 코우보우 대사가 항상 곁에 있다는 '동행이인'을 속으로 외쳤다. 삶의 무게만큼의 배낭을 짊어진 채 비 오듯 땀을 흘리면서 내딛을 때 힘이 되어주던 주문이었다 .
일본에서 밀교를 확립한 승려는 코우보우(弘法) 대사인 구카이(空海·くうかい: 774~835)다. 밀교(密敎)는 다라니나 만트라 경전을 외움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고 정각에 이르고자 하는 실천적 가르침이다. 시코쿠 불교 순례길은 코우보우 대사가 수행한 일본 시코쿠의 4개 현, 도쿠시마·고치·에히메·카가와에 있는 88개의 절을 따라서 4개의 수행 과정으로 나뉜 1200km를 걷는다. 도쿠시마에 있는 1~23번 절은 발심의 도량, 고치현에 있는 24~39번 절은 수행의 도량, 에히메현에 있는 40~65번 절은 번뇌를 끊고 극락정토로 향하는 보리의 도량, 카가와현에 있는 66~88번 절은 번뇌를 이겨 초월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열반의 도량이다.
"실체를 아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라는 코우보우 대사의 가르침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는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쳇바퀴 도는 일상을 벗어나 타오르는 한여름 하루 20~30km씩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집착을 쏟아냈다. 낯선 곳에서 내면의 웅크린 나를 만나고 닫혔던 마음의 길이 열리는 듯했다. 걷기 시작한 지 보름이 채 안 되어 45개의 절에 이르렀을 때 자신을 옭아매던 매듭이 풀리는 듯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 화두삼던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듯 더 이상 길 위에 나서지 않았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여름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도전의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