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풀씨 Apr 08. 2023

봄날의 초대

어른으로 산다는 것

드디어 꽃처럼 어여쁜 조카의 화촉을 밝히는 날. 매운 바람에 매화 향기 날리고 봄이 기웃거리며 고개를 내민 지난 3월 11일 토요일. 아침부터 따사로운 햇살이 대지를 감싸 완연한 봄 기운이 가득했다. 괜히 긴장되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 2020년 1월 시작된 코로나19 확산세도 진정되는 추세였다. 

인륜지대사인 만큼 6년 만에 온 가족이 총출동했다. 그래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평소 일가친척 간 교류가 없다시피하고 머나먼 미국에 거주하는데다 고령이라 참석은 어려웠다. 그나마 엄마도 이래저래 불편한 심기에 몸이 안 좋다며 참석하지 않겠다고 했다. 

2박 3일 일정으로 유일하게 참석하는 동생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일찍이 엄마 집에 와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구석구석 묵은 먼지를 털며 집안 대청소를 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안방 보일러를 가동시켜 방을 따듯하게 덥히고 음식도 준비했다. 남동생은 오전 업무 마치고 점심 무렵 승용차로 출발해 약 5시간 걸려 이른 저녁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집안 가득 활기가 넘쳤다. 그야말로 잔칫집 분위기였다. 미리미리 준비한 갓 담근 생김치와 연포탕, 불고기로 저녁을 먹으며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날 새벽같이 눈이 저절로 떠졌다.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 않도록 손질해둔 음식 재료로 봄동 샐러드와 달걀찜을 준비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뒷정리를 후다닥 끝냈다. 우여곡절 끝에 산 치마 정장을 차려입고 일찍 나섰다. 집에서 예식장 하우스오브드메르 아벨린홀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였다. 예식이 오후 12시 30분이지만 주말인데다 진입로가 한 군데뿐이어서 주차 전쟁을 치르지 않으려면 최소 1시간 전에는 출발해야 했다. 예상대로 예식장 주변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줄줄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미뤄진 결혼식이 오전 11시부터 1시간 간격으로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본관, 신관으로 나뉜 예식장에는 가족과 친지, 친구나 직장 동료 등 하객들로 북적거렸다. 서둘러 나선 덕분에 여유 있게 하객 라운지 소파에서 기다리는데 모습을 드러낸 화사한 신부와 신랑이 눈부셨다. 신부 대기실에서 가족이 단출하게 결혼 기념 촬영을 했다. 우아하게 단장한 언니와 형부는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을 맞이했다. 

언니 집에 얹혀살던 시절 걸음마 떼며 아장거리던 '삐악이' 어린 조카의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했다. 스물아홉 의 무수한 시간이 쏜살같이 흐르고 흘러갔다. 어느새 나무처럼 푸르게 성장해 혼인을 하다니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허전했다. 소중한 인연이 된 영혼의 동반자와 한 가정을 이뤄 희비애락을 함께하며 씨 뿌리고 꽃 피우며 멋진 세상 열어 가기를 빌었다. 

마침내 예식이 시작되고 맨 앞 테이블에 앉았다. 신부와 신랑의 스냅 사진들이 본식 시작 전 소개되었다. 혼주인 양가 어머니의 화촉점화를 시작으로 혼인서약과 성혼선언문 낭독에 이은 축사와 신랑의 노래로 주례사 없이 비교적 짧은 30여 분 가량의 예식이 진행되었다. 신부의 내딛는 발걸음, 표정 하나 놓칠세라 마음에 눌러 담았다. 지켜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했지만 다행히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신부와 신랑의 행진이 시작되고 머리 위로 알록달록한 꽃가루가 흩날리며 새로운 출발의 팡파르가 울려퍼졌다. 길고도 짧은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인생의 한순간이었다.  


조카는 결혼 준비할 게 많을텐데 척척 해냈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자 괜스레 마음이 들썩거렸다. 이모로서 할일은 단지 예의를 갖춘 차림으로 축하하는 일뿐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언니가 옷값을 쥐어주는 바람에 예식장에 입고 갈 옷을 사려고 발품 팔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눈에 드는 옷을 못 사고 결국 있는 정장을 입기로 했다. 그런 속내를 간파한 듯 결혼식을 앞둔 주말, 언니가 슬쩍 지나가는 말로  뭘 입고 갈지 물었다. 잠시 머뭇거리다 할 수 없이 눈도장을 받기 위해 옷을 입어 보였다. 대번에 구닥다리 같다고 한소리를 얻어먹었다. 정장 안에 받쳐 입은 아이보리 색 셔츠가 문제였다. 몇 번 입지 않아 거의 새옷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부득부득 우기면 넘어갈 줄 알았는데... 옷차림이 남루하게 보였는지 재킷 안쪽 닳아빠진 라벨까지 확인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뿔싸! 거짓말이 탄로나 속으로 뜨끔했다.

세련되고 격조에 맞는 옷차림을 기대했던 언니는 가타부타 아무 말없이 쌩 나가버렸다. 죽비로 내려치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금지옥엽 조카의 결혼식인데 옷 한 벌 제대로 깔끔하게 갖춰입지 못하냐는 핀잔이 따갑게 귓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알뜰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나의 부적절한 처신에 유구무언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엄마까지 거들며 훈계했다. 가족 눈에는 자신만의 꽉 막힌 세상에서 고지식하게 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팔십 넘은 엄마가 일을 수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며 중재에 나섰다. 다음날 언니와 형부까지 대동해 부랴부랴 백화점에 갔다. 처음 들렀던 매장에서 입어본 말끔한 스타일의 치마 정장으로 결정했다. 평소처럼 이 옷 저 옷 살펴보고 망설이며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어찌됐든 옷 한 벌 번듯이 사입지 못하는 한심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야 했다. 번개처럼 옷을 구입하고 나니 한시름 놓았다. 별일 아닌데 제 앞가림도 못하고 주변 사람까지 귀찮게 한 셈이다. 

사랑하는 조카의 뜻깊고 특별한 날 빛나게 해주지는 못할 망정 초라한 행색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신의 서 있는 자리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도대체 오십이 넘어서도 서툴기만한 세상사에 언제 어른이 될꼬. 인생의 배움은 끝이 없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누구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