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레벨업했더니 미국에서 튜토리얼 시작

튜토리얼 시작: 한국에서 레벨업, 미국에서 다시 배우기

by 슈퍼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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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두 번째 성장기

나는 마흔이 되던 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40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다가, 정확히 40년째 되는 해에 ‘미국인’이 된 것이다.


말로 적어놓으면 간단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적 변경이라는 말이 가지는 행정적·정서적·문화적 무게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이건 그저 여권 색깔이 바뀌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속한 세계의 언어가 달라지고, 기대치가 바뀌고, ‘정체성’이라는 큰 문장의 주어가 숙연하게 수정되는 일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학생으로, 직장인으로, 청년으로 충분히 살았다.

어느 정도의 성취감, 사회적 위치, 정체성, 그리고 자신감을 갖춘 상태였다.

그리고 29살이던 2013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공부하고, 취업하고, 영주권을 얻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마침내 미국 시민권까지 취득하며 여기까지 왔다.

이 과정은 한 편의 성장 서사이자, 동시에 매 회차마다 장애물 보스가 등장하는 게임 같았다.


한국에서의 나는 ‘만렙’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이미 일상생활의 규칙과 흐름이 몸에 배어 있었다.

지하철에서 어디에 서야 가장 빠르게 환승하는지,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에서 줄이 덜 서는 식당은 어디인지,

상사에게 보고할 때 ‘정확함’보다 ‘눈치’와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까지—


이 모든 것은 몸으로 익힌 기술이었다.

일종의 ‘국내 서버 만렙 캐릭터 스킬 세트’.


그 능력치를 정리해보자면:

상사 기분 게이지 실시간 모니터링 Lv. 99
단체 카톡에서 말 줄이기 스킬 Lv. 80
야근을 미덕처럼 소화하는 체력 + 정신력 버프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 관리 + 강제 텐션 유지 패시브 스킬 장착


그 세계에서는 꽤 능숙하고, 효율적이고, 때로는 꽤 잘하는 플레이어였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


그러나.


미국 서버 접속 – “자, 튜토리얼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깨달았다.

여기는 같은 게임이지만, 완전히 다른 서버였다.

은행 계좌 만들기 = 어려움 난이도 D
운전 면허 전환 = 난이도 C
아파트 계약 = 난이도 B
첫 직장 적응 = 난이도 A
영어로 감정 표현하기 = ??? (아직도 미해결 퀘스트)


전화 한 통조차.

한국에서라면 “네, 그거 이렇게 처리해주시면 됩니다.”로 끝날 일이,

여기서는 5통의 전화, 3개의 이메일, 대기시간 1시간이 기본 패키지였다.


한국에서의 속도는 “생각 → 실행”이었다면

미국에서의 속도는 “생각 → 조사 → 문의 → 대기 → 재문의 → 결국 직접 처리”였다.


심지어 언어가 통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정확히 같지 않았다.

“Yes”는 “가능합니다”가 아니라

종종 “지금은 모르겠고 상황 봐서 연락할게요”였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일상의 모든 행위를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이건 또 무슨 미션이야…?”


슈퍼마켓에서 회원카드를 만드는 것도,

자동차 보험을 고르는 것도,

아이 병원 진료 일정을 잡는 것도,

모두 새로운 튜토리얼 퀘스트였다.


한국에서 만렙이었던 나는 미국 서버에서 ‘레벨 1’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그리고 인정하고 나니, 비로소 진짜 게임이 시작되었다.


두 번째 성장기

그 과정은 불편했고, 느리고, 자주 답답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내 자신을 다시 묻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았다.

미국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이 먼저 왔다.


“왜 그렇게 생각해?”

“넌 어떻게 살고 싶어?”

“네가 원하는 건 뭐야?”


처음엔 그 질문들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직장 문화도 달랐다.

한국에서는 ‘빠르게, 많이, 숨차게, 다 같이’가 효율이었다.

미국에서는 ‘천천히, 정확하게, 내 페이스대로, 책임은 본인이’가 규칙이었다.

어느 쪽이 낫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방향은 달랐다.


그리고 결혼과 육아.

한국에서 정해진 ‘좋은 아빠’의 교본은 여기서 통하지 않았다.

미국은 감정을 말하는 아빠를, 아이의 눈높이를 맞춰주는 아빠를 원했다.

처음에는 어색했고, 가끔은 민망했고, 종종은 서툴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나’라는 사람을 다시 조립하고 있었다.


나는 두 번 자란 사람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이야기다.

한국이라는 서버에서 이미 충분히 성장한 캐릭터가

미국이라는 전혀 다른 서버에서 튜토리얼부터 다시 시작한 이야기.


삶의 속도, 인간관계, 일하는 방식, 가족의 구조, 정체성의 감각.

그 모든 것이 다시 태어났고,

다시 실패했고,

다시 배웠고,

다시 성장했다.


나는 두 번 자란 사람이다.

한 번은 한국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미국에서.


그 두 삶이 겹쳐져 만들어진 지금의 나를

나는 이제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 책은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책이 아니다.

한국이 옳다, 미국이 옳다—그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내가 두 나라에서 겪은 두 번의 성장기에 대한 기록이다.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때로는 코미디였고,

때로는 재난영화였으며,

간혹 아름다운 성장 드라마였다.


그리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튜토리얼은 길다.

하지만,

플레이해보면 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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