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놀음의 탄생기 2부. 고통은 착한 복종의 대가

죄책감 대량 생산 공장: 고통은 너 때문

by 슈퍼T

2부. 타락 서사 ― 고통은 누구의 잘못인가


왜 인간은 고통받는가?

인간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질문은 인류가 문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근본적이고도 끈질긴 문제였습니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신화와 종교적 내러티브들은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고 명확한 답을 제시했습니다. 그 답은 놀랍도록 간단했습니다. “너희 잘못이다.”

이 ‘타락 서사’는 인간의 고통이 외부의 우연한 불운이나 신의 무자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행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고대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조건을 규정하고, 사회 질서와 권력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고통이 인간의 ‘죄’ 혹은 ‘불순종’의 결과라는 메시지는, 고통받는 자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현 체제와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강력한 통제 장치였습니다. 이 내러티브는 단지 개인의 고통을 설명하는 신화적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불평등과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작동한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 고통의 기원을 다룬 타락 서사의 기원과 전개, 그리고 그 정치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깊이 탐구할 것입니다. 왜 신들은 인간에게 유토피아 같은 완전한 세계를 허락했으면서도, 곧 파국과 고통을 몰아넣었는지. 신을 넘보려는 인간의 불순종은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고통과 불평등이 개인의 죄와 책임으로 귀결되는 논리가 어떻게 체제 순응을 강화하는 데 쓰였는지를 살펴봅니다.


에덴동산과 황금시대 ― 유토피아의 기억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고대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 황금시대는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전해 내려오지만,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구조를 지닌 유토피아적 기억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이 처음에는 신과 가까이 살며 완전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누렸다고 말합니다. 이 내러티브는 단순한 낭만적 환상이라기보다, 인간 존재와 사회 질서에 대한 집단적 기억과 기대가 투영된 신화적 설계도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노동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풍족했고, 고통이나 죽음의 위협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직접 교제하며, 인간과 신 사이에는 경계 없는 친밀함이 존재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황금시대에서도 인간은 씨를 뿌리지 않아도 땅이 곡식을 내주었고, 노쇠하거나 병드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갔으며, 서로 다투지 않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두 유토피아적 기억은 흥미롭게도 단순히 행복한 옛날을 그리는 회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현 세계의 불행과 불완전함을 설명하기 위해 설정된 대조적 장치였습니다. 완전했던 시대가 한순간에 무너지고, 인간이 고통과 불행 속으로 떨어졌다는 서술은 “왜 지금의 세상이 이토록 힘든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대적 해답이었습니다.

더 주목할 점은 이러한 서사가 단지 종교적 위안에 그치지 않고 사회 질서 정당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에덴동산에서의 추방은 인간이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짊어져야 할 이유를 설명했고, 황금시대의 종말은 인간이 불가피하게 신들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 즉, 유토피아는 단순히 이상향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이 왜 고통스럽고 불평등한지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였습니다.

철학자 에르네스트 블로흐는 인류 역사 속의 유토피아 사상을 인간 집단의 가장 오래된 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결코 실현을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고대의 신화적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불완전한 체제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장치였습니다. “너희가 겪는 고통은 원래 없었던 것이지만, 너희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메시지가 바로 유토피아적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국 에덴동산과 황금시대는 인간이 바라는 완전함과, 그 완전함을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절망을 동시에 담아낸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은 이상향의 기억처럼 보이지만, 실은 현재 질서와 권력의 정당성을 떠받치는 신화적 토대였던 것입니다.


불순종의 죄 ― 신을 넘본 인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는 단순히 과일 하나를 따먹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명령에 대한 근본적 불복종이자,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였습니다. 선악과는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인간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별하고자 하는 지식과 주체성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뱀의 유혹에 흔들렸고, 결국 금단의 열매를 입에 댔습니다. 그 순간 인간은 신의 영역에 속한 지혜를 스스로 차지하려 했고, 그 대가는 낙원에서의 추방과 노동과 출산의 고통이었습니다.

비슷한 구조가 그리스 신화에서도 발견됩니다. 판도라는 신들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여성이었고, 그녀는 신들의 선물과 함께 치명적인 금기를 부여받았습니다.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항아리. 그러나 호기심과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판도라는 결국 뚜껑을 열었고, 그 속에서 온갖 재앙과 질병, 불행이 세상으로 흩어져 나갔습니다. 단 하나 남은 것은 희망뿐이었습니다. 판도라의 선택은 개인의 실수라기보다는 인간 전체가 짊어져야 할 불행의 기원을 설명하는 상징적 사건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두 신화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나왔지만, 인간의 본성과 질서 유지에 대한 비슷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인간은 신의 경계를 넘으려는 순간 반드시 파국을 맞이한다. 다시 말해, 불순종은 곧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정치적 기능을 지녔습니다. 권력자와 종교 지도자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질서와 금기를 어기는 행위가 공동체 전체의 불행을 초래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불순종의 죄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의 문제를 동시에 규정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무겁게 돌아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원죄의 개념으로 발전시켜,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를 짊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는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 신의 은혜 없이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신학적 구조를 확립했습니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이 불순종의 서사는 인간 욕망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어진 질서 속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더 알고 더 가지려는 본성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질서의 경계를 넘는 순간, 고통과 불행이 따라왔습니다. 니체는 이를 두고 기독교가 인간의 창조적 의지를 죄책감으로 전환시켰다고 비판했으며, 프로이트는 판도라의 항아리를 무의식의 억압이 풀리는 장면으로 해석했습니다. 억눌린 욕망이 해방되는 순간, 그것은 개인과 사회 모두에 불안과 혼란을 불러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의 죄는 단순히 신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인간 사회의 근본적인 통제 장치로 작동했습니다. 질서를 위협하는 모든 행위는 불행을 불러온다고 경고함으로써, 사람들은 체제에 순응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졌습니다. 인간이 신의 경계를 넘은 순간 시작된 파국은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반복되는 권력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타락 이후의 세계 ― 고통의 정당화

타락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평화롭고 완전한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의 내러티브에 따르면, 에덴에서 추방된 인간은 새로운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아담은 땀을 흘려 땅을 갈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노동의 운명을 짊어졌고,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죄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은 단순히 생명의 끝이 아니라, 인간이 신적 질서를 거스른 결과로 주어진 형벌이자 인간 조건의 불가피한 한계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스 신화 역시 유사한 구조를 보여줍니다. 판도라의 항아리가 열리고 나자, 질병과 굶주림, 시기와 질투, 그리고 끝없는 불행이 인간 세상에 퍼져 나갔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보호 속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없었고, 삶은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변했습니다. 이 내러티브는 단순히 불행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고통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라는 교훈을 반복적으로 각인시켰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신화들이 고통을 단순한 우연이나 자연의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고통은 질서 있는 세계에서 벗어난 인간의 불순종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은 정당화될 수 있었습니다. 노동은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죄의 대가였고, 여성의 고통은 불순종의 상징으로 제도화되었으며, 죽음은 원죄의 그림자였습니다. 사회적 불평등 또한 신이 정한 질서 속에 포함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인간의 삶을 신적 질서와 연결시켜 해석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고통을 제도와 구조의 문제로 비판할 수 있지만, 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곧 신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불평등에 저항하거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든 불행의 근원을 개인의 잘못, 공동체의 불순종에서 찾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 사상은 강력한 정치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로마 제국 시기의 기독교 신학자들은 인간의 고통을 죄와 연결 지으면서, 황제와 교회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종교적 신앙을 넘어 사회적 통제의 원리로 작동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고통을 체제 유지의 장치로 사용하는 이러한 구조를 두고, 권력의 가장 은밀하면서도 강력한 메커니즘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니체 또한 기독교 도덕이 인간의 창조적 힘을 억압하고 고통을 죄책감과 결부시킴으로써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타락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는 신화는 단순한 종교적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을 당연시하고, 불평등을 정당화하며, 체제에 대한 순응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불행을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만드는 이 내러티브는,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살아남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타락 서사의 정치적 기능

타락 서사는 단지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인 교훈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권력자에게 매우 유리한 정치적 장치로 기능했습니다. 인간이 겪는 고통과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과 죄로 돌림으로써,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이나 불만은 억눌리고, 권력 구조는 더욱 공고히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고대의 군주와 사제, 제국의 지배자들은 이러한 신화를 통해 자신들의 지배를 신적 질서와 동일시했고, 백성들이 겪는 불행을 제도나 권력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창세기의 서사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노동의 고통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아담이 불순종한 결과로 규정되었습니다. 여성의 출산 고통과 종속적 위치는 하와의 죄와 연결되었습니다. 나아가 죽음마저도 원죄의 결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렇게 모든 고통을 인간 자신의 불순종에 귀속시키자, 현 체제와 사회 질서에 대한 불만은 곧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신성 모독이 되는 구조가 마련된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기능했습니다.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불행이 퍼졌다는 이야기는, 고통의 원인을 여성과 인간의 불순종에서 찾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이 신의 질서를 거슬렀기 때문에 불행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 내러티브는, 불평등한 세계를 정당화하는 하나의 장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서사는 정치적 권력에 끊임없이 이용되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교회는 농민들의 가난과 고통을 신의 뜻으로 설교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신앙 교육이 아니라, 농노와 평민들이 봉기하거나 저항할 생각 자체를 꺾어버리는 장치였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신이 정한 질서로 받아들이도록 만들면서, 봉건적 위계는 자연스럽게 신성화되었습니다.

근대 이후에도 이러한 논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살아남았습니다. 산업혁명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고통은 개인의 게으름이나 도덕적 결핍으로 치부되었고, 제국주의 시기에는 식민 지배가 피지배 민족의 ‘타락’이나 ‘열등성’ 때문이라는 논리가 정당화되었습니다. 이처럼 타락 서사는 신화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유지하는 강력한 도구로 기능했습니다.

결국 타락 서사는 단순히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불평등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하며, 체제에 대한 저항을 봉쇄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였습니다. 신화는 인간의 죄를 말하는 동시에 권력의 언어로 작동했습니다.


타락은 신화인가, 장치인가?

타락 서사는 단순한 신화적 설명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사회 구조에 깊이 뿌리내린 장치였습니다. 근대 철학자 니체는 이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도덕과 타락 서사가 인간에게 죄의식을 끊임없이 주입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억압하도록 만든다고 보았습니다. 니체가 말한 노예 도덕은 바로 이러한 구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과 힘을 긍정하지 못하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를 낮추는 존재로 길러졌던 것입니다.

프로이트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죄책감이 단순한 도덕 감정이 아니라, 문명이 유지되는 핵심 장치라고 분석했습니다. 원초적 욕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죄책감은 개인의 정신을 통제할 뿐 아니라, 사회 질서의 기초로 작용했습니다. 다시 말해, 죄책감은 종교적 교리의 부산물이 아니라, 집단을 통제하고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메커니즘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니체와 프로이트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믿음이 단순한 진리가 아니라, 사회 권력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장치임을 지적했습니다. 인간은 불행을 경험할 때 제도를 의심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탓하도록 길러졌습니다. 신의 질서를 거스른 죄, 도덕을 어긴 잘못, 공동체의 규범을 지키지 못한 실패가 곧 개인의 고통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러한 서사는 여전히 작동합니다. 학교와 직장에서의 실패,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좌절조차도 구조적 문제보다 개인의 무능이나 게으름 탓으로 환원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아서 그렇다”라는 흔한 말은, 사실상 타락 서사의 현대적 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 구조의 불평등을 가리는 동시에, 개인에게 죄책감을 전가하는 효과를 냅니다.

종합하자면, 타락 서사는 인간의 고통을 설명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였습니다. 그것은 고통의 원인을 인간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신과 권력에 대한 복종과 순응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 타락은 단순한 신화적 서술이 아니라, 고통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기제였으며, 수천 년 동안 체제를 지켜온 위대한 이야기로 기능해왔던 것입니다.



추가적으로 고려할 만한 사례와 시사점:

타락 서사는 단순히 유대-기독교 전통이나 그리스 신화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한 문명과 사상 체계에서도 인간의 고통을 해석하는 방식은 반복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속에는 정치적 질서와 사회적 통제의 흔적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데, 여기서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신들의 결정과 인간의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길가메시가 영생을 찾아 헤매지만 끝내 좌절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결코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음을 다시 확인시킵니다. 이 신화적 서술은 인간의 유한성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죽음과 고통이 신의 질서 안에서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사상에서는 ‘타락’이라는 개념보다는 다른 방식의 해석이 발전했습니다. 도교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우주의 조화가 깨진 상태로 설명했고, 불교에서는 업과 무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의 욕망과 무지가 고통을 초래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전통에서는 ‘죄’라는 개념보다 ‘무지’나 ‘불균형’이 강조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은 신의 명령을 어긴 결과라기보다, 우주적 질서나 개인의 깨달음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는 타락 서사가 가진 정치적 통제의 가능성과는 다른 길을 보여주며, 권력의 정당화보다는 수행과 깨달음을 통한 해방으로 나아가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비교 지점을 제공합니다.

현대 심리학 역시 타락 신화의 지속적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연구자들은 죄책감과 자기비난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얼마나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지적합니다. 우울증, 불안 장애, 자기혐오 같은 문제들이 단순히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내면화된 죄책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이는 곧 고대 신화가 남긴 유산이 여전히 개인의 내면 깊숙이 작동하며, 고통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으로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비교와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시사점은 분명합니다. 타락 서사는 단순히 고대인의 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권력 질서를 지탱하고 고통을 정당화하며 인간을 순응하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장치는 시대와 문명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고통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곧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였고, 그 언어가 어떻게 쓰였는가에 따라 개인의 삶과 집단의 질서가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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