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찾을 수 있을까
─뭘?
─원인을, 원인의 원인을
─「야맹증」 부분
“『가능세계』를 읽으면서 저는 절규를 형상화했구나 싶었어요. (……) 시를 읽다 보면 미친 듯이 절규에 매달린다고 여겨집니다. 매달릴 게 절규밖에 없다는 몸짓 같다고 할까요.”* 동료 시인이 증언하는 백은선의 『가능세계』는 한 권 분량의 절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할 수 없다’와 ‘알 수 없다’의 마음으로 세상을 읽는 시인의 절규는 “나는 모른다네”(「어려운 일들」)라는 시집의 첫 줄로 열려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도움의 돌」)라는 말로 닫히고 있다. 이 시집의 절망은 웅장하고 파괴적이라기보다,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스며드는 절망에 가깝다.
이 시인의 절망에는 좀처럼 보이는 것이 없다. 백은선 시의 절망은 처음, 중간, 끝으로 잘 짜인 서사 구조를 갖지 않는다. ‘원인’이나 ‘원인의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감각은 절망에서 태어나고 다시 절망을 낳는다. 시인은 절망에 대한 단서를 남기기보다, 절망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한다. 원인이나 단서를 찾을 수 없는 절망은 서사 구조를 의도적으로 탈피하여 오직 그것이 감각되는 방식만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백은선의 시집을 읽어내는 과정은 텅 빈 공간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절망과 오롯이 독대하는 감각들로 넘쳐난다. 조연정은** 백은선의 시 세계에 대해 절망과 파국만이 남아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슬픔을 동반한 고통이 환기된다고 말한다. 서사성이나 스토리 구조가 의도적으로 분쇄되고, 파편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시가 ‘어떤 한계를 넘어선 거대한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백은선의 시는 오직 절망을 위한, 절망에 의한 세계로 읽힌다.
섣불리 그 세계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시인이 단서를 남기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곳에서 쉬운 희망은 말할 수 없다. 희망이 철저하게 차단된 이 시집은 절망을 넘어 ‘절망의 절망’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게 끝이면 좋겠다 / 끝장났으면 좋겠다 (······) 끝장날 걸 알고도 끝장나고 싶어”(「가능세계」)라는 고백은 ‘끝장의 끝장’이 의미하는 완전한 실패를 꿈꾼다. 그러나 고백에 따라붙는 ‘―하고 싶다’는 말꼬리가 눈에 밟힌다. 끝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남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백은선은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가능세계」에서 ‘하고 싶다’는 마음을 잔뜩 남겨둔다. “터무니없는 것을 시작하고 싶다”, “나는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어”, “하고 싶다 하고 또 하다가 (……) 반복으로 가득 차고 싶다”는 마음은 정말 완전한 소진을 바라는 사람의 것일까. 쉬운 희망은 말할 수 없지만, 어렵게라도 희망을 말해 볼 수 있을까. 절망의 절망을 그려내면서 한편에서는 ‘하고 싶은’ 마음을 남겨두는 시인의 의도를 읽어보기로 한다.
* 김소연의 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창작과비평』 44(2), 441쪽.
** 조연정 해설, 「소진된 우리」, 『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210~243쪽.
*** 박상수, 「얼마나 끔찍하고 얼마나 좋은지 – 백은선론」, 『문학과사회』 31(3), 22〜42쪽.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