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여기가 마지막이면서도 다음이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끝장내고 싶”은 마음과 “터무니없는 것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한곳에 담아낸다. 끝내고 싶으면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나는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어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라는 물음으로 맺힌다(「가능세계」).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정확히 절반씩 있다면, 그 사람은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죽고 싶은 것일까. 끝에 대한 감각 안에 다음에 대한 감각이 공존하는 이상, ‘끝’과 ‘시작’은 분리하기 난감한 것이 된다.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우리 앞에 던져지지만, 백은선의 시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시작/처음’과 ‘끝’이라는 단어들의 경계는 분리하기 어려운 스펙트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동시에 태어난다. 딱딱한 혀 딱딱한 얼음 딱딱한 세계. / 그러면 도래하는 영원. / 그러면 증발하는 영원. (······) 첫 행이 씌어지는 순간 마지막 행도 함께 씌어진다.
─「파충」 부분
처음과 끝이 / 아무것도 아닐 때 / 부풀어 오르다 꺼져버리는 (······) 처음의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 뒤바뀔 때 / 우리의 귀가 일시에 사라질 때
─「기면발작」 부분
저고는 어떤 겹이 아닌 구의 형태가 되어 순환하는 독립된 소리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 현상에는 아래와 위, 처음과 끝이 없습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동시에 무한히 끝나는 저고들에 대한 저고들의 저고들이 저고들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절망과 유사한 풍경이다. 한 문화평론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고」 부분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읽게 된 사람들에게 시작과 끝에 대한 감각은 동시에 발생했다. 시작부터 끝을 예감하는 일은 완고한 세계가 변할 가능성이 없다는 해석에서 그쳐선 안 된다. “시작과 끝은 맞물려 있다. 동시에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화자에게 ‘영원’은 “도래하는” 것이면서 “증발하는” 것이 된다(「파충」). ‘영원’이라는 사건에 ‘도래’와 ‘증발’이라는 서로 다른 내용이 기입되는 순간, 맞물린 시작과 끝 역시 양쪽 방향 모두를 향해 전개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이 세계에서는 정반대의 전개 가능성을 동시에 갖는 사건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처음과 끝의 감각은 순서상 구분되지 않고, 끝에 대한 예감 역시 시작에 대한 믿음으로 전이될 수 있다. 「저고」에서도 “아래와 위, 처음과 끝”이 없는 현상이 등장하고, ‘저고’라는 체계로 불린다. 중요한 것은 ‘저고’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일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동시에 무한히 끝나는” 이 체계는 ‘처음과 끝’이라는 구분을 무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백은선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독특한 공존의 감각을 공유한다. 시작과 끝에 대한 감각은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절망 속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상기했을 때, “그것은 절망과 유사한 풍경이다”라는 대목은 한층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다시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면, 처음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이 세계는 명명할 수 없는 무정형의 상태에 가깝다. 실제로 백은선의 시에서는 ‘말할 수 없음’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처럼 공포를 동반하거나, “뾰족한 연필을 입속에 넣는다 (·····) 내가 입을 여는 순간 검은 실뭉치가 툭 떨어져 내릴 거다”(「木浦」)와 같은 예감으로 그려진다. 이 명명의 불가능성은 한 겹 더 두꺼워진 ‘절망의 절망의 절망’으로 돌아간다고 읽히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다음 페이지에 대한 희망을 연장시키려고 한다. 문장의 끝과 시작을 연결하는 ‘접속사’의 등장은 그 시도에 꼭 필요한 사건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