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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4)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나는 눈이 내리는 바다 앞에 서 있다. 바닷물 위로 눈송이들이 떨어져 사라지는 것을 본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년 동안 서 있었던 것 같다.     

내내 그렇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덮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     

나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언어를 가르쳐주는 심정이 되어, 스스로에게 겨우 하나씩 말한다.     

눈, 바다, 눈, 바다 그리고 눈 그러나 바다 그러므로 눈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바다.     

하나씩 떨어진 눈송이들이 심해에 다다를 때까지 그런 리듬으로.     

떨어져 물밑을 뒤덮을 때까지 그런 호흡으로.      

(······)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다.     

우리는 단지 사후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짐작하며 조금씩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눈의 호흡으로.      

(······)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물을 때. 나는 점점 더 의기소침해진다. 갑자기 아무것도 연주할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지켜보는 풍경을. 입술을 뗀 직후 연인의 얼굴을 볼 때. 그의 눈 코 입 너머로 먼 미래의 이별을 미리 겪는 것. 매번 새롭게 이별하는 것. 그리고 침묵.     

나는 바다 앞에 서 있다. 수평선을 절벽이라고 믿었던 옛날 사람들과 같은 마음이 된다. 나는 내용 없는 빈 중심이 된다. 하나씩, 접속사들을 꺼내 적어본다.     

나는 눈이 내리는 것을 본다. 하얗게 공중을 흔드는 눈송이들이 닿는 순간 사라진다. 부지불식간에 천년이 흐르는 것을 본다.      

말할 수 없다.

─「고백놀이」 부분     



 눈 내리는 바다 앞에서 서 있는 ‘나’는 여전히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떨어지는 눈송이가 바닷물에 사라지는 순간은 찰나이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무한으로 반복된다. 눈 내리는 바다의 풍경에서는 존재함과 사라짐의 순간이 끊기지 않는다. ‘눈’이 아니라 “하나씩 떨어진 눈송이들”은 시작과 함께 끝나고, 끝남과 함께 시작하여 무한히 반복되는 도돌이표의 풍경을 그린다. 그 풍경은 “세상의 모든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덮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접속사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잇는다. 끝난 문장 뒤에 접속사가 붙는다면, 다음 문장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접속사가 가지는 ‘잇는다’는 기능은 앞서 이야기한 다음 페이지에 대한 믿음과 연결된다. 완결된 문장에 ‘그러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접속사가 붙을 때, 다음 문장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접속사는 끝이 다시 시작이 되는 순간에 등장한다. 


 ‘나’에게 다가온 접속사의 감각은 이내 눈이 내리는 것처럼 길고 느린 호흡으로나마 말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언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스스로에게 겨우 하나씩 말”하기 시작한다. 이때 ‘나’가 하는 말들은 ‘그리고’, ‘그러나’, ‘그러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들로 연결되어, 의미 없어 보이는 단어들을 반복한다. 접속사는 고작 ‘눈’과 ‘바다’라는 두 단어를 연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의미의 무게는 상대적이다. 언어를 처음 배운 아이가 하는 말을 보고 시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백은선의 화자가 내내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을 느끼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화자에게는 여전히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일”이라는 절망이 남아 있지만, “짐작하며 조금씩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감각을 더해 간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사소하고, 의미 없어 보이는 말들의 반복일 수 있지만, “더듬거리며 고백”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연쇄하는 절망의 돌파구가 된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끝없이 누군가를 속으로 부르는 이상한 기분이 될 테지, 그리고의 행렬 안에서 자꾸만 실족하는 (……) 이런 기분을 알아?      

길을 되돌리는

길을 되돌리는

─「어려운 일들」 부분     


알고 있어 너는 목소리에 대해 말하려 했지

목소리에 대해 말할 목소리가 없겠지     

나는 접속사처럼 지워지는 물      

(……)     

단순한 형태 단순한 동작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겠지

─「명륜동 성당」 부분     



 접속사에 대한 감각은 다른 시편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다만 「고백놀이」에서처럼 확실한 희망 대신, 보일 듯 말 듯하게 희미한 돌파구의 흔적을 내비친다. 접속사의 등장만으로 백은선의 시집을 장악하는 거대한 절망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다. 끝에 대한 감각은 다음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길고 질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다음 문장은 단순히 그 절망이 거기서 멈추지 않도록 자꾸만 길을 돌려보낸다. “그리고의 행렬 안에서 자꾸만 실족”하는 일은 끝에 대한 확신과 다음에 대한 믿음이 서로의 걸음을 방해하는 탓이다. “길을 되돌리는” 기분은 지금 여기서 끝이라고 말하는 ‘나’와 그렇지 않고 싶다고 말하는 ‘나’가 화해하지 못한 채, 빙 둘러 걷고 있는 길을 증명한다(「어려운 일들」). “혼절과 반복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싶은”(「가능세계」) 화자는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백은선의 시 세계를 쉽게 끝에 대한 감각으로만 속단해서는 안 된다. 끝에 대한 예감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싶은 화자에게는 다만 접속사가 필요하다. 「명륜동 성당」에서 “접속사처럼 지워지는” 순간과 “목소리에 대해 말할 목소리가 없”는 순간은 연결되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말하기 위해서는 접속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록 ‘의미 없는’ 단어들의 반복 속에서 실족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적어도 여기서 마침표가 찍히는 것은 잠시 미뤄둘 수 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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