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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아픈 여자의 ‘쇼’와 ‘부정성의 주체’ (1)

박서원론

1. 들어가며     


아프면서 여자인 것을 이야기하는 이 글은 쉽게 실패할 것이다. 아픈 여자라는 단어에 따라 나오는 그 ‘지겨운’ 도식들을 떨쳐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반복되는 단어들은 쉽게 낡아버린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말이 담고자 했던 것 역시 무엇이든 상관없이 함께 낡아버린다는 점이다. ‘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억압’이라는 말에 담긴 ‘가부장제’나 ‘여성의 억압’은 맥락상 전혀 다른 관계를 맺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낡아버렸다. 이것은 온전히 답습의 문제인가? 재현의 종언을 선언하고, 새로운 재현의 출현을 요구하는 자에게 물을 책임은 없는가? 박서원의 화자인 아픈 여자의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왜 내가 아픈 이유를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증상의 재현이 나의 아픔을 증명하는가. 


아픈 여자는 아프면서 여자라는 점에서 동어 반복이자, 결핍에 결핍을 더한 이중의 타자이다. ‘아프다’는 상태를 정의해 온 방식은 여성을 정의해 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딘가에는 ‘건강’이라는 상태가 있다고 여겨지고, 아프다는 것은 그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상태에 대한 타자항으로 구성된다. 보편에 대한 결핍으로 규정되는 ‘아픔’의 상태는 치료의 대상이다. 아프다는 진단이 내려지는 순간, 그것은 비정상에서 정상 상태로의 교정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유사한 방식으로 초기 페미니즘 이론에서 발견된다. 여성은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남성의 결핍 상태로서 타자의 위치에 자리를 잡는다. 남성의 타자항으로 성립되는 여성의 존재는 일종의 비정상 상태와 다르지 않고, 따라서 정상 상태로의 진입을 요구받는다. 그것은 남성으로 상징되는 보편-이성-진리의 상징체계로의 편입을 의미한다. 이런 결론은 초기 페미니즘 이론의 업적이자 과오로 남는다. 여성이 타자로 규정되는 과정은 포착되었지만, 동시에 남성은 여전히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자리에 남겨졌다. 그러고는 여성 역시 그 자리로 갈 수 있고, 가야 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프거나 여자인 존재를 논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규정되는 방식에서 기준으로 제시되는 상태에 대한 물음표가 먼저 찍혀야 할 것이다. 아프거나 여자라는 결핍 상태를 규정하는 건강하거나 정상인 상태가 정말 있는가? 


장애학에서는 오랫동안 비정상 신체로 간주하는 것이 사회·문화·역사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그들의 비정상 신체는 정상 신체라는 정상성의 이탈 상태로 간주된다. 타고난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서 정상성 표준을 통한 배제의 결과로 구성되는 장애는 여성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맥락과 결을 같이하면서,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맥락에 의해 장애가 타자화되고 재현되는 현상을 드러낸다. 따라서 아픈 여자는 아프면서 여자라는 점에서 동어 반복이자 결핍에 결핍을 더한 이중의 타자이다. 그렇다면 아픈 여자들은 무엇이 될 수/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기 페미니즘 이론이나 장애학의 시도처럼 스스로가 배제나 결핍의 결과로 구성된, 다시 말해 오해받아 온 존재라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프지 않은 존재가 되려는 시도 역시 모순으로 돌아간다. 


박서원의 시에서는 내내 ‘아픈 여자’가 등장한다. 공공연한 시인의 개인사 등의 외재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시인을 꼭 빼닮은 화자는 여러 시편에서 일관적으로 발견된다. 그들을 하나로 압축할 수 있는 단어는 ‘아픈 여자’이다. 그러나 박서원의 아픈 여자는 페미니즘 이론은 물론이고, 문학에서 아픈 여성이 다루어져 온 유구한 전통과는 다른 궤도를 택한다. 그의 시에서 아픈 여자는 결핍이나, 치료의 대상, 심지어는 질병으로 은유되곤 하는 가부장적 폭력의 결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박서원 시의 화자는 살기 위해 고통을 필요로 하는 마조히즘적 주체를 닮았다. 그에게 고통은 생존과 유희에 연결된다. 그러나 그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태에서부터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픔이 타인의 욕망에 의해 자의적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차단한다. 아픔으로 인해 부정성의 주체로 사유되는 화자는 오히려 그 부정성을 음흉한 방식으로 전시한다. 박서원의 아픈 여자는 아프고 여자인 것의 존재를 해독하려고 하는 온갖 욕망들의 시도를 번번이 실패하게 만든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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