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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아픈 여자의 ‘쇼’와 ‘부정성의 주체’ (2)

박서원론

2. 마조히즘적 주체의 생명 본능

     

박서원 시의 화자는 고통을 먹고 자란다. 단순히 외부에서 유입되는 고통의 윤곽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적극적으로 갈구한다. 박서원 시에서 고통은 주로 신체적인 통증이나 정신질환의 징후로 그려지는데, 화자는 구체적으로 신체 혹은 정신의 손상을 야기하는 바로 그 고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야기되는 고통의 원인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부장제나 자본주의 질서 혹은 정치적 상황 같은 고통의 원인은 박서원의 시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아픈 여자를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은, 원인 모를 아픔 앞에서 갈 길을 잃는다. 아픈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그것을 매번 가부장 혹은 자본주의와 연결해 온 느슨함은 박서원식 고통 앞에서 긴장하기 시작한다. 외부적 고통의 원인이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박서원 시의 고통은 쉽게 해독 불가능하다. 그는 도리어 고통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연장해 나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모태부터 저주받은 몸뚱이가

저주를 받아야 제 힘을 얻는 것은

3월의 눈이 내리는 이유와

같아서

갈증은 오히려 꽃 대신

마디마디 내 뼈를

살찌게 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갈증은 갈증을 위해서

3월의 눈을 내리게 해

─「학대증 2」 부분(1-40)     


이렇게 하염없이 세월을

어떻게 눈을 뜨고 사는가

가슴속에 당겨지는 사건도 없이

고통이 없으면 심심해서

어떻게 지내는가 말이다

누구 하나 내 이름 불러주는 이 없이

저녁은 가버리는데

─「누가 나에게」 부분(1-61)


사랑한다. 천년만년 빌어먹을 빌어먹을 예복을 입고 뿔피리를 불며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위태로울수록 행복한 나는 발버둥 칠수록 아름다워지는 나는 그토록 자유롭고 치욕의 뿌리인 나는 허리춤에 채찍과 가죽구두 한 켤레 여전히 미친 말들의 마차를 몰고 정글을 헤쳐나가는 여전히······.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내 사랑

─「소명 1」 부분(2-115)     



화자의 신체는 “모태부터 저주받은” 것으로 고통을 타고난 운명이다. 모태에서부터 운명지어진 자신의 신체에 대한 화자의 결정권은 없다. 영양분을 섭취해야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생물체의 원리를 닮아, 화자에게 “저주”는 자신의 신체가 마땅히 섭취해야 할 영양분과도 같다. 저주로 직조된 화자의 신체는 “저주를 받아야 제 힘을 얻는” 몸이다. 신체로 대변되는 운명의 통제권을 태초부터 상실한 화자에게 가능한 것은 자신에게 허락되는 상태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는 것뿐이다. 고통이 아닌 것을 먹고살 수 없다면, 배가 터질 때까지 고통을 먹는 삶을 선택해버리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극단적인 자기파괴의 본능으로 읽힐 수 있는 피학증의 이미지는 도리어 생명 본능과 연결되는 아이러니가 탄생한다. 화자의 삶에서 죽음 충동과 생명 본능은 구별되지 않는다. 저주받은 신체가 야기하는 “갈증”은 “오히려 꽃 대신 / 마디마디 내 뼈를 / 살찌게” 하며 화자를 양육한다. 그는 고통을 소멸이나 파괴로 치닫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자신의 “뼈를 살찌게” 하는 양분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 양분이 ‘갈증’이라는 점에서 박서원 특유의 고통 섭취법은 꼬리를 물고 물리는 아이러니로 남는다. 


시인은 고통은 고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갈증은 갈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뿐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소위 ‘긍정적인’ 속성으로 초월하려는 의지 따위는 없다. 진짜 고통은 그런 것 따위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인의 세상에 고통 이외의 감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고통의 감각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따라서 고통이 없는 상황은 곧장 존재가 외부 세계나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연결되어 ‘따분함’이나 ‘지루함’과 같은 정서를 발생시킨다. “고통이 없으면 심심해서 / 어떻게 지내는가 말이다”라는 고백은 오감이 고통으로 활성화되는 화자의 세상을 보여준다. 고통이 없다면 화자도 없다. 고통이 없어진다는 것은 모태에서부터 저주를 받은 신체가 존재하는 원인이 사라진다는 것이므로, 존재는 사라진다. 고통이 없으면 “누구 하나 내 이름 불러주는 이 없이 / 저녁은 가버”린다. 저주로 양육되고, 고통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화자는 “위태로울수록 행복한 나”이자 “발버둥 칠수록 아름다워지는 나”로, 일반적인 비례식의 정반대 공식으로 도출된다. 박서원식 고통의 아이러니는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내 사랑”이라는 대목에서 폭발한다. 보부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여자가 가장 훌륭한 승리를 거두는 순간은 비참한 심연에 떨어졌을 때이다. 여자는 가장 철저한 자기 포기에 동의하면서 자신에게 절대적인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즉 마조히즘은 여성에게 최고의, 동시에 유일한 승리를 약속해 주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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