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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아픈 여자의 ‘쇼’와 ‘부정성의 주체’ (3)

박서원론

3. 진단명 : 없음 혹은 ‘쇼’ 


물론 이것은 초월적 영웅이 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존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승리라는 점에서 반쪽짜리다. 박서원의 화자가 허락받은 것은 오직 고통을 통한 자기 포기로서의 승리로, 마조히즘적 주체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여성의 마조히즘은 쉽게 오독되거나 소거된다. 반쪽짜리 승리인 마조히즘은 특히 그것이 신체적 통증을 유발하는 아픔과 관련될 경우, 진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여성 주체의 주도권은 쉽게 회수된다. 다시 말해, 여성의 통증은 주체의 발화를 통해 언술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진단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역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여성의 신경증이 규정되어 온 방식의 조야함은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아프다’라는 진단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픈 여자의 통증은 보여지고, 진단되고, 승인될 때 비로소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몇 겹의 억압으로 쌓여 있다. 박서원의 화자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 지점에서 자신의 아픔을 감상하고 구경하는 자들을 향해 자신이 일종의 ‘쇼’를 하고 있다는 인식이 발견된다.     



누구나가 그럴듯하게 조금씩은 연기를 잘해내지만 내 연기는 특별한 데가 있어. 가족들과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모아 비난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 내가 아무리 아파서 발버둥 쳐도 동생은 신나에 뿌려진 불덩이처럼 미쳐 날뛰는 “쇼”라고 말하고 동네에서는 망나니라고 혀들을 차거든.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 태양과도 같은 판토마임을 향해서 속력을 내는 건지도.

  한 번도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는 것. 이 천형을 미치광이라니.

  “쇼”라니.

  “쇼”라는 게 별 게 있어. 보여지는 게 “쇼”지. 사실 무대와 현실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도 아냐. 위치에 따라서 모양이 바뀌어 보이는 의자와 걸상의 관계지. 혹은 양말과 장갑의 관계. 

─「판토마임」 부분(1-22)     

 


그들의 눈에 화자의 아픔은 ‘연기’로 보인다. 반쪽짜리 승리라도 거머쥐기 위해 끌어안은 고통이지만, 그것은 ‘아픈 것이 아니다’라는 진단을 받는다. 화자에게 고통은 실재하는 감각이며 세계와 자신을 인식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화자가 “아무리 아파서 발버둥 쳐도”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신나에 뿌려진 불덩이에 미쳐 날뛰는 ‘쇼’라고 말하”거나 “망나니라고 혀를” 찬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들은 화자는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환자에게는 의사의 진단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흔들림이다. 그러나 화자의 생생한 고통은 “한 번도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도록 한다. 그의 고통이 ‘연기’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 병명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화자의 고통에 내려지는 오진은 아픈 여자의 통증이 재현되는 방식을 묻는다. 시인은 누군가의 고통은 단순히 증상으로 재현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치에 따라 모양이 바뀌어 보이는 의자와 걸상의 관계”는 화자의 증상이 ‘고통’ 혹은 ‘쇼’로 재현되는 방식을 닮아 있다. 화자에게는 절대적인 통증이지만, 그것이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픈 여성의 통증은 당사자의 재현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다만 아픈 여성을 바라보는 외부 시선의 위치에 의해 규정될 뿐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승인받을 수 있는 재현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외부의 기대와 욕망에 부합하지 않는 재현은 ‘쇼’로 치부될 뿐이다. 박서원의 화자는 언제나 승인받지 못하는 고통의 재현을 반복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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