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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아픈 여자의 ‘쇼’와 ‘부정성의 주체’ (4)

박서원론

4. 피학적 ‘쇼’의 우회성과 부정성의 전복


아픔의 상태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박서원의 시에서 아픔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된다. 이는 은유로서의 질병이 가부장제의 폭력에 의한 여성 억압의 징후로만 그려진 기존의 독법과는 사뭇 다르다. 고쳐져야 할 것은 ‘나’의 아픔이 아니라, ‘나’의 아픔을 진단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화자의 아픔을 승인하고 인정하는 위치를 선점한 재현의 폭력이다. 그들 앞에서 자신의 아픔이 ‘쇼’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한 화자는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기 위한 극단의 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가로등 밑으로 머리숱 많은 여자가 지나가고

  하얀 자동차 세워진 도로에서

  엄마,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모든 게 진실하기만 하다면 얼마나 욕되겠어

  싸울 게 없는 일방통행인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겠어 때로는 가식이 필요해

  엄마, 아직 이른 새벽에 부슬비 오는데

  이빨을 갈며 불온한 서적을 태우고 바로 당신이었던 육체에 세계를 심겠어 아이를 낳겠어 술을 마시면 더욱 맑아지는 정신으로 나만의 몫이었던 죄와 폭발만 살찌는 불바다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애비 없는 아이 하나 낳겠어

   (……)

  엄마,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모욕을 받고 싶어 만일 모욕이 없다면 우리의 나날은 얼마나 지루하겠어 때로는 잃어버린 고통을 찾아 나서야 해

   (……) 

  어두워지면 한껏 타오르는 난로에 양은 주전자 가득 물을 끓이고 마약보다 화려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악을 쓰며 애비 없는 아이 하나 낳아 보이겠어

─「엄마,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어」 부분(1-18)     



“애비 없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선언의 발신자는 ‘엄마’다. 화자는 자신의 몸을 낳은 엄마를 향해 애비가 없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선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화자의 되풀이는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신체를 가장 극단의 방식으로 점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애비 없는 아이가 연상시키는 죄나 모욕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재영토화하려는 것이다. 앞서 등장했던 마조히즘적 주체의 면모는 또다시 극단의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점유하려고 하는 화자의 선언에서 드러난다. “애비 없는 아이”를 낳는 것은 ‘애비’와 ‘엄마’로 대변되는 외부자로부터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 혹은 통제권을 빼앗아 오는 가장 극단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모태부터 저주받은 몸뚱이”(「학대증 2」)였던 화자의 몸은 사생아의 출산을 통해 스스로에게 저주를 내린다. 다시 말해,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저주가 아니라, 자기 의지로 탄생시키는 저주를 스스로의 신체에 각인시키는 것이다. “당신이었던 육체에 세계를 심겠어 아이를 낳겠어”라는 선언은 “그래, 더 큰 고통을 가지고 와. 내 사랑”이라던 고백을 잇는 고통의 아이러니를 반영한다. ‘나’의 신체와 아픔을 진단할 권한을 가진 ‘당신’의 소유권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몫이었던 죄”를 심는 화자의 육체는 이제 어쨌든 화자의 것이 된다. 


애비 없는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은 앞서 나의 아픔을 ‘쇼’로 치부한 상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장 극적으로 연출된 ‘쇼’다. “마약보다 화려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악을 쓰며” 죄의 씨앗을 내어놓는 화자의 출산 장면은 “낳아 보이겠어”라는 술어 부분에서 다분히 전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나’의 아픔이 ‘쇼’로 진단될 수밖에 없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타락의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화자의 의도와 최초로 부합하는 진단을 받아내고야 마는 것이다. 타락을 의도한 화자의 전시는 모욕이라는 감상을 받아내는 순간에 성공한다. “그따위 상투적인 죽음 이미지 말고 구체적으로 설득력 있는 나의 죄를 물어줘” (「실패」)라고 당부하는 시인은 어차피 실패할 존재라면 그것이 강렬한 장면으로 전시되길 바라고 있다. 시인이 꾀하는 성공은 이처럼 다분히 피학적인 장면들로 연출되며 그의 아픔을 ‘쇼’라고 치부했던 자들의 진단이 철저하게 실패한 오진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아픈 여자의 ‘쇼’는 화자의 아픔을 진단하던 재현의 폭력에 맞서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박서원의 화자는 ‘쇼’를 통해 애비 없는 아이의 출생이 암시하는 부정성을 수행한다. 아픈 여자가 수행하는 부정성은 수행의 주체가 오히려 무엇이 ‘도덕적’인지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음흉한 것이 된다. 화자가 애비 없는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전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인 재현의 문법에서 부정성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가 수행하는 부정성은 단순히 재현의 문법을 해체하는 기존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재현의 문법 내부로부터의 파열을 의도한다. 다시 말해, 아픈 여자의 ‘쇼’는 상징계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니힐리즘적 수행보다는 상징계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의 정당성을 우회적으로 되묻는 수행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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