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원론
그러나 아픈 여자는 결국 피학적 ‘쇼’를 최후의 수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박서원 역시 ‘쇼’를 연출함으로써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승리인 ‘자기 포기’로 그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인가. 아픈 여자가 읽힐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아픈 여자일 때뿐인 것인가. 만약 박서원식 고통의 종착지가 단순한 마조히즘적 ‘쇼’의 연출이라면, 그의 시 역시 예상 가능한 아픈 여자의 결말을 답습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박서원의 고통은 유난을 떨지 않는 식으로 아픈 여자의 새로운 결말이자 시작을 보여준다. 앞서 박서원의 여성 화자를 억압하는 외부적 원인은 그의 시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박서원의 아픈 여자는 ‘결과’로 읽히지 않는다. 게다가 반쪽짜리라고 해도 스스로 피학적 ‘쇼’를 연출하는 화자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상징계를 공격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반쪽짜리 승리가 합해진 결과, 박서원의 아픈 여자가 독특한 방식으로 시도하는 ‘탈출’이 조금씩 드러난다. 바꿔 말한다면, 박서원은 여전히 아픈 여자이려고 한다는 점에서 탈출하지 ‘않은’ 아픈 여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무너진 그대로 오세요
난 옆집, 양말이나 뜨며 창밖을 큼큼거리는
고양이 노파가 아니랍니다
그래도 조금은
당신의 기워진 살과 흐르는 얼룩을
채에 거를 줄 알아
(……)
난 기다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
앞치마를 두르고 생선 구워요
산타클로스는 지옥에서조차 버려진 영혼의 굴뚝에만
찾아온다는 걸 아시지요
깨진 그대로 오세요
깨진 그대로 오세요
깨어져서 이를 앙다물게 돼도 그대로 오세요
괜찮아요
─「그대로 오세요」 부분(2-171)
적막,
모든 육신의 뚜껑을 열고
모든 소리를 들어야 하리
나뭇잎 세포가 시들어가는
떨림까지도
말갈퀴는 고요히 눈보라 치고
마부는 눈이 멀어
마을로 가는 입구는 넓다
이 모두를 잿더미로 끌어안고
적막,
모든 목소리를 들어야 하리
─「門으로 가는 길」 부분(2-177)
상대를 향해 “무너진 그대로 오라”고 말하는 화자는 자신에게 다가올 존재들의 아픔을 물질적으로 공유하는 아픈 여자다. 그는 “옆집, 양말이나 뜨며 창밖을 큼큼거리는 / 고양이 노파”가 아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감상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그는 “당신의 기워진 살과 흐르는 얼룩을 / 채에 거를 줄” 아는 사람이다. “기워진 살과 흐르는 얼룩”을 가진 ‘당신’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픈 (여자)이다. 아픈 나는 아픈 당신의 ‘살’과 ‘얼룩’의 고통을 알기에 기꺼이 그것을 채에 걸러줄 수 있는 아픈 여자다. 아픈 여자의 초대는 상대가 “그대로 오”는 것을 허락한다. 아프지 않거나, 정상인 상태로 바뀐 미래 따위는 없다. 그래서 그들은 “참을 수 없으면 참을 수 없는 그대로” 만나게 되고, “깨진 그대로” 만나게 된다. 그들의 만남은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아픈 당신을 기다리는 나는 다만 “앞치마를 두르고 생선”을 굽고 있을 뿐이다. 아픈 나와 당신의 만남은 둘 다 아프다는 점에서 “그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박서원의 아픈 여자는 외부적 폭력의 결과로 해독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가부장제 등의 폭력을 드러내는 증거로 소비되지 않는다. 보통 결과로서의 아픔으로 독해되는 아픈 여성의 이미지가 박서원의 시에서는 새로운 출발점에 자리하고 있다. 폭력의 결과라면 그 아픔을 사랑할 수 없지만, 그것이 고쳐져야 하는 장애나 결핍이 아닌 ‘나의 아픔’이라면 그곳에서 시작할 수 있다. 눈이 먼 마부에게 “마을로 가는 입구는 넓다”는 표현에서처럼 아픔이나 결핍의 부정성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되고 있다. 박서원 시의 궁극적인 종착지는 바로 이곳에 있다. “모든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면 “적막”에 거해야 하는 것처럼, 아픈 여자는 그 자체로 부정성을 전복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기꺼이 “모든 육신의 뚜껑을 열고” 소리를 듣고자 하는 화자에게 더 이상 아픔은 정상성을 회복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앞서 화자가 연출한 피학적 ‘쇼’에서 아픔이 무엇보다 화려하게 전시되어 아픔을 승인하는 주체인 재현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이 시에서 화자에게 아픔은 인정이나 투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새로운 출발점으로서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아픔으로 상징되는 부정성이 “모두를 잿더미로 끌어안”기 시작하는 성질을 획득하면서, 아픈 여자의 부정성은 더 이상 외부적 억압이나 폭력의 ‘결과’가 아니라, “모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선결 조건이 된다. 이제 박서원의 아픈 여자가 보여주는 부정성의 주체는 파괴적인 ‘쇼’만을 연출하는 피학적 주체를 뛰어넘어, 재구축이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인 힘을 소유한다. 그들은 고쳐질 필요가 없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