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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선교 Apr 09. 2023

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5)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4. 나가며 : 눈이 내리는 풍경     


나는 가장 이상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어

고백할 수 없는 시월에 대해

눈 이전의 계절에 대해

스스로를 알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가장 불가해한 것에 도달하고 싶었어     

눈이 내린다 눈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손바닥으로 굽은 등위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눈은 내리니까 눈은 모든 것과 무관하니까      

(……)     

처음부터 예감만으로 존재하는 것 확인할 수 없는 물질에 대한 것 넘어서는 지점에서 거꾸로 다시 시작되는 것 이전과 같이 이후 없는 것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감각으로 실현되는 것 이것을 눈이 내린다고  말한다.

─「비신비」 부분     



 백은선의 시는 시작부터 끝을 예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페이지가 있다고 믿었고, ‘그러나’ 여전히 말할 수 없다는 절망에 사로잡혔고, ‘그렇지만’ 더듬거리는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이 문장은 앞으로도 몇 줄이고 더 길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의 행렬 안에서 자꾸만 실족”(「어려운 일들」)하는 일은 아직 마침표를 찍고 싶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가능세계」)은 그 사람은 종종 눈이 내리는 풍경에 멈춰 선다. 「파충」, 「고백놀이」, 「비신비」 등의 시편에서 화자는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고백할 수 없”고 “가장 불가해한 것에 도달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여기에 서서 그저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본다. 그가 고백에 성공했는지, 불가해한 것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 이 시집의 문장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가 결말이라는 확신과 다음 페이지가 있다는 가능성은 어느 한쪽의 확신으로 맺히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것은 ‘예감’, ‘확인할 수 없음’, ‘다시 시작’, ‘이후 없음’의 감각들을 뒤죽박죽으로 소환한다. 이 시집 전체를 돌고 돌았던 감각들이 눈 내리는 풍경에 모여든다. 그중에서 마지막으로 적힌 표현을 따로 빼서 적어본다.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감각으로 실현되는 것”. 처음부터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버렸기 때문에 죽고 싶고, 또 하고 싶은 마음은 둘 중에 하나만 남을 필요가 없다. 이 시집이 소진된 세대의 절망이나, 억지로 만들어낸 희망으로 마침표 찍힐 이유도 없다. 끝에 대한 예감과 다음에 대한 믿음은 그 자체로 눈 내리는 풍경을 만든다. ‘눈이 내린다는 것’을 감각하게 만든다. 눈 내리는 풍경에서 시작과 끝의 순간은 무한히 반복되고, 백은선의 화자 역시 반복해서 “나는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어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라고 묻고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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