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
첫 페이지를 펼치는 동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함께 읽는 책이 있다고 생각해 본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말을 알게 된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백은선의 시에서는 이 고통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금지된다. 처음부터 읽게 된 마지막 페이지에는 고통과 절규가 여전할 것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 결말을 미리 말하는 것이 스포일러라면, 백은선의 시에서 스포일러는 언제나 허용이다.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지
우리는 기다린다
우리가 서로를 죽이기 전에
너희가 서로를 죽이기를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 해
저 산산이 부서지는 아름다운 창들을 보렴
이토록 커다란 텅 빔을
끝이 끝과 연쇄하는 꼴을
다 지워버릴 것을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저 불쌍한 손들을 이미 씌어진 것들을 다시 반복하는 아무도 붙잡아주지 않는 차가운 마디를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구나 그렇지 않니 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고 그 꿈을 믿어 그래서 더 큰 기다림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해
(······)
왜 나는 이것을 손에서 놓지 못할까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
끝도 없이
가라앉는 섬들을 옥상에 올라가 지켜봤어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 부분
이 페이지에서 여자는 죽는다 여자의 죽음은 아무런 의문과 영향을 남기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절벽은 무너진 다음의 가능태이다
더위에 지친 짐승들처럼
(······)
그녀는 갑자기 사라진 사람 고개를 들면 다른 시공간 속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다음 페이지에서 숲이 생겨나고, 마른땅에서 빛이 솟을 거라고
─「중력의 대화자들」 부분
「밤과 낮이라고 두 번 말하지」는 백은선의 시 중에서도 드물게 스토리의 형태를 갖춘 시편이다. 이 시는 자신이 3차 대전으로 핵이 터진 후 남겨진 사람들과 공동 셸터에서 지낸다고 믿었던 한 소녀의 일기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그곳에는 ‘나’와 함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너’가 옆에 있다. 어느 날, 공동 셸터에 두 아이가 잡혀 들어온다. ‘나’는 철창에 갇힌 두 아이를 보며 “우리는 어떻게 될까?”라고 생각한다. 결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우리’의 관계와 철창에 갇힌 ‘너희’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를 거울처럼 비춘다. 곧이어 “모두 서로 배반할 거라고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다는 강한 확신이 비집고 들어온다. 끝을 이미 확인한 사람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뒤섞여 서로의 시제를 침범한다. ‘나’는 배반을 단지 예감하는 것이 아니라, “맨 뒷장에 씌어져 있었다”는 과거형의 시제를 사용해 마치 미래를 보고 온 사람처럼 말한다. ‘미래’에 “다 지워버릴 것”을 ‘현재’에 “계속해서 적어 내려가”는 일이나, ‘과거’에 “이미 씌어진 것들”을 ‘현재’에 “다시 반복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지워질 것이라는 사실을 현재에 ‘이미’ 알고, 과거에 씌어졌다는 사실을 현재에 ‘아직’ 모른다. 구분되어야 할 시제의 혼용은 곧이어 대조되는 감각들의 결합으로 이어진다. “떠오를 때는 가라앉는 느낌도 들곤”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처럼 정반대의 감각들이 공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우리’와, 서로 배신할 ‘우리’는 같은 사람들이다. 이미 결말을 읽어버린 존재의 시간은 뒤죽박죽이 되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는 한편 서로를 배신한다.
절망의 스포일러로 가득한 ‘나’의 이야기는 절규를 형상화했다는 이 시집의 설명에 걸맞다.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한 ‘나’는 현재의 절망을 견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절망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해”라는 ‘나’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화된다. “네가 나를 죽이는 꿈을 꿨고 그 꿈을 믿”는다고 해도, 현재의 ‘나’는 ‘너’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것”은 시의 맥락에서 특정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놓지 못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화자의 사랑은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도 ‘너’를 놓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백은선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그저 절규로 끝나지 않을 수 있는 ‘희망’을 암시한다. 이어서 등장하는 행에 주목해 보자. “끝을 안다고 적어놓고서 / 의미 없다고 말해놓고서”에 따라 나오는 말은 “끝도 없이”로 적힌다. 문장 구조 상 “끝도 없이”는 다음 행의 “지켜봤어”와 연결되지만, 의도적으로 그 앞에 배치된다. 여전히 이야기의 맨 뒷장을 읽고 온 화자에게는 “가라앉는” 섬들을 옥상에 “올라가” 지켜보는 정반대의 감각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끝도 없이”라는 말은 그 감각에 앞서 적힌다. 이것은 결말을 알고 있는 자가 하는 최대한의 사랑 고백이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끝도 없이”라는 한 줄은 끝에 대한 감각이 오직 절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희망을 품게 만든다. 「중력의 대화자들」에서도 끝에 대한 감각과 다음 페이지에 대한 믿음이 공존한다. 이 페이지에서 화자는 “죽는다”와 “않는다”와 “있었다”는 동사를 함께 사용한다. “죽는다”와 “않는다”는 현재 시제로 쓰여 있고 “있었다”는 과거 시제로 쓰여 있는데, 일반적으로 현재 시제는 늘 일어나는 일 혹은 어떤 것의 고유한 특성을 설명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여자가 죽는다는 사실이 현재 시제로 사용될 경우, 결코 변하지 않을 결말의 도래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을 꼭 쥐고 있었다”는 과거 시제가 끼어들어 마지막 순간의 여자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마지막 문장의 과거 시제는 앞선 “죽는다”, “않는다”와 같은 층위에 있어야 할 이유가 충분해 보이지만, 불쑥 등장해 현재 시제의 불변성을 뒤흔든다. 시인은 절대 확실한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조금씩, 끝에 대한 감각에 스며드는 다음에 대한 희망을 흘려보내고 있다. ‘절벽’이 “무너진 다음의 가능태”라는 말처럼, 무너진 상태에 다음은 있지만 그것은 ‘가능태’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결정된 결말의 다음에는 현실태로 될 ‘가능성이 있는 가능적 존재’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가능태의 존재는 희망의 희미한 잔상으로 남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페이지 속의 여자는 “고개를 들면 다른 시공간 속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페이지에서 죽는 여자가 “다음 페이지”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녀가 믿고 있는 다음 페이지는 숲이 생겨나고, 빛이 솟아오르는 상승의 풍경화를 그리고 있다. ‘절벽’이 무너진 것이라면, 다음 페이지의 ‘숲’과 ‘빛’은 솟아오를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와 다음 페이지에 대한 믿음은 서로를 무효화하지 않고, 정반대의 감각으로 기묘한 공존을 이어 나간다.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