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는 한국에서 건너온 늙은이다. 이름부터 한국에 가장 흔할 것 같은 순자는 한국에서 가져온 화투와 보약, 미나리 따위에서 그녀가 골수까지 전통 한국인임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한국 사람의 섭생과 가정문화, 아이 키우는 방식 등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그녀의 특성은 미국으로 이주한 딸 부부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순자만의 개성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전형성을 함유하고 있다.
순자는 한국전쟁 때 남편을 잃고, 홀로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자식을 길렀다. 그녀에게 생활은 곧 생존이었다. 삶을 위한 가식과 허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인생의 본질을 곧이곧대로 꿰뚫어버리는 통찰력은 바로 이 생존력에서 말미암는다. ‘식구를 위해서라면’, 더욱이 ‘내 새끼를 위해서라면’이라는 때로는 거대한 둠 같고 때로는 아찔한 낭 같던 이 전제는 고난의 역사를 뚫고 살아남은 저력의 밑거름이 되어 순자의 뼈 속에서 곰삭았다.
순자는 아이에게 어른들의 화투 놀이부터 가르친다. 심장병을 앓는 아이에게 달리기를 권하고, 그 아이 앞에서 버젓이 레슬링 프로를 시청한다. 하지만 쿠키를 만들 줄도 모르고 영어를 잘하지도 못하고 손자 말에 따르면 냄새까지 나는 것 같다. 더욱이 시커멓고 맛없는 이상한 약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강요한다. 할머니가 아닌 헬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먹긴 하지만 손자 데이빗은 죽을 맛이다. 자신의 오줌으로 헬머니를 테러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소년의 귀여운 복수와 쾌감, 이어지는 아버지의 엄격한 회초리 훈육, 중재하는 할머니의 참견과 애정어린 걱정! 중년 이상의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봄 직한 추억이자 그리움이다.
할머니에 대한 데이빗의 미움은 서랍 사건에서 반전하며 그녀의 진심에 눈뜨기 시작한다. 회초리 사건부터 말랑해지기 시작한 데이빗의 마음은 할머니가 자기 다리를 치료하며 ‘스트롱 보이’라고 추켜세워 주었을 때 활짝 열리게 된 것이다. 강한 소년이라고 불리게 되면서 나약한 아이는 자신이 강한 사람임을 믿게 된다.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대로 하면 더 좋아질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아이는 우려와 금기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으로 자라는 것임을 우리는 ‘아, 그렇지!’ 하고 새삼 깨닫는다.
한편, 순자는 주변 강대국들의 숱한 침략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준다. 순자의 손자는 병약한 아이로만 길들어져 왔다. 순자는 아이를 ‘스트롱 보이’로 호명하며 단번에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다. 벼락 같은 순자의 훈육법을 지켜보며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한국인들이 자녀들을 어떻게 길러왔는지를 깨닫는다.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한국인들은 아무리 말 설고 낯선 땅일지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무리를 지으며 뿌리를 내리고 새파랗게 살아나 주변을 정화하며 선한 영향력을 발산하고싶어한다. 온 산과 들에 사는 뭇 목숨의 씨앗들과 숨탄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하지만 그러한 그녀에게도 찔리는 게 있다. 자식에게 잘해주지 못한 죄책감이 한평생 한 바지게다. 아버지 없이 자라게 한 죄, 배불리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한 죄, 자식이 조국을 버리고 낯선 외국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든 죄, 온 강산을 불태워버린 전쟁을 미리 막지 못한 죄 따위가 죄다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라 여긴다. 이 때문에 순자 세대들은 자신도 모르는 죄의식에 주눅 들어 있다. 마치 원죄에 묶인 카인처럼, 이 순진무구한 영혼의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겪은 불행을 대물림되는 세상을 무간지옥이라 여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화재는 한국의 순자 세대가 지닌 죄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