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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아람 Oct 02. 2021

미나리

-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보고 3 <내가 읽은 책과 세상>

성서에서 흘러온        


한국에서 온 이 쭈글쭈글한 노인네는 다행히도 인내할 줄 아는 딸과 씩씩한 사위를 두었다. 그들 또한 한국인이다. 그들도 한국인이긴 하지만 절반은 미국인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식된 미나리처럼 제이콥과 모니카는 서로를 구해 주기 위해 미국 사회로 이주해 왔다. 젊은 부부는 한국 문화와 미국문화를 모두 체험한 이민 1세대다. 이들이 이주민이라는 것은 도시 생활을 접고 아칸소의 작은 시골로 이사하는 사건이 잘 보여준다. 바퀴 달린 집은 이주한 지 10년이 다 되도록 뿌리 들린 삶을 살아야 했던 이 가족의 불안함을 잘 보여준다. 그 불안함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들머리에서 더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 밑에 얼룩져 배어있다. 게다가 어린 아들의 심장병은 서사의 수풀에 숨겨진 올무처럼 식구들을 조마조마하고, 관객에게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보는 이가 끝까지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플롯은 작가의 몫이다.     


제이콥은 야곱에서 흘러온 이름이다. 야곱은 하느님을 이긴 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은혜를 약속받는다. 인간의 본능 속에 잠재된 축복된 꿈을 추구하는 인물로 풀이된다. 자신은 물론 가족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하기를 바라는 제이콥은 성서의 야곱과 닮았다. 또한 야곱이 자기 후손과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우물을 판 성서(요한 4:12)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도 농사를 위한 우물 파기로 잘 나타난다. 미나리든 사람이든 목숨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물이다. 물은 곧 자연이자 하느님이 내어주는 삶의 모유를 상징한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현모였던 성녀 모니카에서 따온 이름이다. 오로지 자녀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이 그러하듯 그녀 또한 심장병이 있는 아들 데이빗을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여기며 가족을 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환경 속에서 키우려고 애쓰는 현실주의적 모성애를 지녔다. 이렇게 두 인물은 이상과 현실을 추구하는 대립적 사고를 하지만 부부라는 가족공동체로 단단히 묶여있다. 가장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를 대변하기도 한다. 갈등하다가 이해하고, 다시 다투고 화해하는 소시민적인 삶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데이빗은 한국식 이름으로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순자가 ‘데이빗아’라고 부르며 한국식 호명법이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한국 이름은 아니다. 이것은 모니카가 제이콥을 ‘지영아빠’라고 부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또 데이빗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윗의 영어식 이름이다. 유대민족의 2대 왕으로서 최초의 통일왕국을 이룬 다윗은 솔로몬의 아버지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약속받은 인물이었다. 데이빗이 할머니의 아가페적인 사랑 세례를 받는 것은 분명 성경의 코드와 연결된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피를 준 자와 피를 받은 자의 관계로 읽히는 두 인물은 부수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서사의 후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 순자가 ‘지영이(앤)’보다는 데이빗에게 매달리는 것에서 남아를 선호하던 유교적 한국 문화를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거기서 우리는 전형적인 남성 문화가 지배하던 오랜 유대문화의 맥락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폴은 사도 바울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가는 길에 부활 예수를 만나는 강렬한 체험을 한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지키는 사도로 돌아서고, 그리스도교가 이민족에게로 퍼져나가는 데에 마중물이 되었다. 영화 속 폴은 성서 속 바울의 삶과 겹쳐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폴은 자유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죄를 지었고, 그런 까닭에 늘 속죄하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지는 고행을 자청하는 폴은 비록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가식적인 믿음으로 가득 찬 교회 안 사람들과 대조된다. 바울이 예수님을 생전에 만나지도 못한 외부인이었고 더욱이 한때는 적대자였지만 끝내 마음을 돌린 것처럼 폴 또한 교회 외부의 참 신앙인으로 그려지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폴은 처음 이사 와 모든 것이 낯선 제이콥 가족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농사일을 매개로 맺어지는 제이콥과 폴의 관계는 그러나 좀 묘하다. 언제나 진정성 있는 도움을 주려는 폴인데도 불구하고, 제이콥은 폴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이 모습에서 관객의 의심은 제이콥이 폴의 진정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 이것은 일상 속의 은혜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한편 제이콥이 모니카와 비교될 때는 이상주의로 보이지만 폴과 비교되면 오히려 세속적으로 보이는 것도 재미있는 설정이다. 그만큼 폴은 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인물로 보인다. 교회라는 세속적 공간(현실 조직)을 넘어선 참다운 영적 세계를 갈구하는 참 신앙인으로 묘사된다. 믿음의 형식을 초월하기에 어떨 때는 주술의식을 자행하는 미신적 신앙인으로 비추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가 벌이는 일련의 미신행위는 우리에게 이타적 순수로 다가온다. 어쩌면 그의 미신적 주술은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고승의 파행과 겹쳐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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