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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Oct 02. 2021

미나리

-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를 보고 4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물과 불, 그리고 미나리


미나리는 초본식물이다. 순자가 자랑스럽게 말하듯이 물만 있으면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 그도 그럴 것이 미나리의 ‘미’가 물을 뜻하기 때문인데, 이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물이라는 뜻을 지닌 ‘미’는 ‘밀(mil)’ 혹은 ‘미르(mir)’에서 온 말로, 어원이 꽤 깊고 퍼진 지역도 넓다. ‘물’도 ‘밀’에서 모음이 바뀌어 된 말이다. 물의 일본말이 ‘미즈’라는 것도 놀랍고, 만주어나 퉁구스어에도 비슷한 낱말들이 있다. 우리말 가운데 ‘미역’(을 감다)‘, ‘미역(국을 먹다)’, ‘미르/미루(용), 미륵(용신)’, ‘미리내(은하수)’, ‘미루나무(포플러)’ 따위가 있다. 모두 물과 관련이 있어서 생긴 말이다. 따라서 미나리는 ‘물에 사는 나리’라는 뜻을 지닌다. 산에 사니까 ‘메나리’, 물에 사니까 미나리다.   

    

'물'은 상징으로 코드화되어 영화 전반을 가로지른다. 순자가 가져온 미나리 씨앗을 키우는 시냇물과, 농사에 필요한 물을 찾기 위한 제이콥의 우물은 생명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순자의 시냇물이 미나리를 살리고, 미나리는 사람을 먹인다. 우물은 농작물을 기르고 농작물은 인간을 먹인다. 제이콥은 농작물을 판 돈으로 가족을 먹일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냇물과 제이콥의 우물은 다른 면도 있다. 냇물은 굳이 파지 않더라도 흐르지만 우물은 땅을 파서 지하의 물줄기를 찾아 땅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냇물 찾기가 채집 같은 것이라면 우물 파기는 농사 같은 것이다. 냇물은 자연 혹은 하느님의 속성에 더 가깝다. 우물은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난 인류가 노동의 대가로 얻은 문명과 의미가 통한다.

오줌과 보약은 냇물과 우물이 반전된 구조로 배치되어 이야기를 떠받든다. 오줌은 보약에 비하자면 자연적인 성과물이지만 사람 몸이 쓰고 남은 찌꺼기 같은 배설물이다. 보약은 오줌에 비해 인간의 노력이 훨씬 많이 투자된 문명의 성과물이지만, 사람을 건강하게 하는 약물이다. 따라서 오줌은 자연에 가까운 성질을 띠고 보약은 문명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오줌을 마신 순자와 보약을 마신 데이빗의 반응은 참으로 재미있다. 둘 다 원해서 마신 물들은 아니지만, 마신 다음에 보이는 반응은 매우 대조적이다. 데이빗은 이것저것 많은 부분에서 할머니가 싫었는데, 보약 때문에 결정타를 먹었다. 몸에 좋은 것은 어른들의 말일 뿐 우선 먹기가 불편하고 싫은 것이다. 오줌 복수극을 다짐할 만큼 마시기 싫은 몸에 좋은 약물이라니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오줌을 마시게 된 순자는 어떠한가? 그녀는 순간 본능적으로 몸서리를 치긴 했지만, 그 얄팍한 분노는 사랑스러운 '손주 새끼' 앞에서는 봄눈처럼 금세 녹아 버린다. 아들이 회초리라고 찾아 들고 온 어처구니없는 매를 본 순간 기화해 버린 제이콥의 노여움처럼.    


사람이 어떻게 몸에 좋은 약을 먹고도 복수를 계획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몸에 나쁜 배설물을 마시고도 용서할 수 있는가? 순자와 데이빗의 관계는 단순히 한국 문화의 조손 관계에 머물지 않고 초월해 버린다. 자그마한 이 짜임새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 하느님과 유대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로까지 확대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연다. 따라서 물은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생명의 젖이며 자연 그 자체로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불에는 보약보다 더 강력하게 문명을 환기하는 힘이 있다. 병아리 감별소 바깥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에 관한 한마디. 병아리 감별소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며 '왜 수평아리를 태우는 줄 아니. 쓸모가 없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남자는 쓸모가 있어야 해.' 여기서 물론 불의 이미지가 정면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 연기를 보과 우리는 불이 지닌 열의 이미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은 헛간을 태우는 장면에서 폭발처럼 출현한다. 순자가 가누기 힘든 몸으로 쓰레기를 태우다 실수로 헛간을 태우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참혹한 지경에 빠지게 한다. 아칸소로 와서 여태까지 제이콥이 얼마나 고생하여 얻은 농작물임을 잘 알기에 관객으로서는 이 장면만큼 경악스러운 대목이 없다. 게다가 그들은 순자의 가족 사랑이 마치 야곱과 다윗에게 주었던 하느님의 사랑에 비견될 만한 것임을 잘 이해하고 있다. 모든 기대와 희망이 한순간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이 절망감 뒤에서 사탄의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쓰레기 태우기는 뜻하지 않은 불의 덩굴이 되어 드럼통 바깥으로 기어나간다. 불길이 이어 헛간으로 번져 갈 때 순자는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그 부자연스러운 손놀림과 몸짓 속에는 사위의 꿈과 땀, 딸의 인내와 희망,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데이빗과 앤의 미래가 다 들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 거대한 홍수를 이루며 태산처럼 밀려올 때 그녀는 차라리 거기에 빠져 죽고 싶었을 것이다. 사위의 농작물이 재가 되는 동안 순자의 영혼은 얽히고설킨 온갖 감정과 생각들에 모질게 고문당하다가, 마침내 벼락같은 고통의 포승줄에 묶여 무간지옥으로 내던져졌을 것이다.  

    

헛간의 불이 모든 것을 재로 만든 후 가족의 갈등은 사라진다. 순자의 헛간 불은 순자 세대의 한국전쟁을 떠오르게 한다. 자신의 실수로 수확물을 잃었듯이 이주민의 부모 세대들은 한국전쟁으로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이에 따른 죄책감과 채무 의식에 시달리고 있었던 부모들은 부모 노릇 한번 제대로 하고 싶은 속죄의식 때문에 자식들에게 무한 희생을 서슴지 않았는지 모른다. 불!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위대한 문명이기는 하지만 이 불로 인하여 수많은 멸망이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계속>

헛간의 불이 모든 것을 재로 만든 후 가족의 갈등은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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