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콥과 모니카의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다툼의 뿌리에는 늘 생활을 위한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제이콥은 아칸소로 와서 아버지가 성공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모니카는 남편의 새 사업이 잘되어 안정적인 수익과 교육환경으로 아이들을 안전하게 키우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한국을 떠날 때의 약속처럼 서로 구원해 주리라 믿었다. 꿈의 나라 미국에서 무엇이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으리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제이콥의 일은 쉬이 풀리지 않고, 모니카는 생활 불안에 심적 고통이 쌓여간다. 뿌리 들린 개구리밥처럼 10년째 떠돈 이주 생활인데 다툼이 없을 수 없다. 아이들은 부모의 다툼에 익숙해진 듯 다투는 사이로 조용히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코끝이 찡해지는 장면이다. 겨우 땅을 개간했다 싶더니 물이 말라버리고, 괜찮게 수확했다 싶더니 느닷없이 계약이 취소된다. 어렵게 판로를 찾았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헛간에 불이 난다. 불운과 좌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이젠 정말이지 손을 놓고 싶은 순간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끊이지 않는 불운과 실패 뒤에 찾아온 행운, 마침내 찾아낸 새길! 불운에 좌절하고 실패에 주저앉지만 않는다면 삶은 계속된다. 불운과 실패가 남긴 틈 사이로 꽃피우는 행운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이며, 그 희망의 징검다리를 그들은 건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삶은 선택이다. 자녀를 돌보는 문제가 그들을 막아섰을 때 그들은 순자라는 구원자를 생각해 냈고, 농사에 부족한 일손은 이웃에 사는 폴이 해결해 주었다. 막힌 판로는 새로운 판로를 만들어 뚫었다. 그런데 데이빗의 심장병은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다 나아간다. 그러니 헛간이 잿더미로 변하였더라도 제이콥은 다시 시작할 것이고, 모니카는 끝까지 가족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헛간의 화재 이후 거실 한 공간에서 온 식구가 한데 어울려 잠을 잔다. 그 속에 딸 부부의 다툼도, 손자 녀석의 짓궂은 장난과 귀여움도, 사위의 땀 냄새도, 딸의 고달픔도 다 녹아들어 있다. 이 장면은 모든 재산이 불타는 장면을 본 관객의 허탈감 속으로 야릇한 뜨거움을 쏟아붓는다. 꿈의 나라라고 하지만 물설고 낯설었던 만리타국 미국!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서로의 구원을 다짐했던 ‘사랑’ 때문이 아니였을까? 그 사랑의 결실로 이룬 ‘가족’ 덕분이 아니였을까? 가장 큰 실패와 좌절 끝에 가족이 함께 쉬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으로 우리 가슴을 두드린다.
미나리는 한국에서 서양으로 이식되었다. 미나리뿐이겠는가? 화투와 보약, 회초리 문화 등 한국 문화는 이주민 사회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에 이식되었다. 하지만 이 한국 문화의 주인공들은 그들에게는 너무 낯선 성경 속 성인의 이름을 이식받았다.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병아리 감별소 앞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듯이 미국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다른 문화들은 이주하고 섞이고 융합해 가기 마련이다. 다만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용인하고 사랑하며, 자연(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느냐 하는 것일 터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