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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Jun 01. 2022

무당2

한국 문화의 원형을 찾아서 <내가 읽은 책과 세상>

◇     

세습무는 여러 모로 강신무와 상반되거나 다른 점이 많다. 세습무의 기원은 주로 농경을 바탕으로 한 사회에서 찾는다. 원형적으로 여자 무당이 많고 딸이나 며느리로 세습된다. 그 집안의 아들이나 남편은 주로 바라지(장단 등 공연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도우미 구실)를 맡는다. 여성이 핵심이며, 오롯이 여성이 주도하는 살아있는 페미니즘이다.     


세습무는 사람이 신을 모셔오며, 집안의 무업에 따라 이를 물려받게 된다. 무업 계승은 시어머니에서 딸이나 며느리로 이어지며 아들*이나 남편은 바라지(악공 구실)를 한다. 세습무는 대대로 일종의 도제교육에 따라 이어지고 탄생하므로, 인위적인 힘으로 그 계승 끈을 끊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억압받아 사라진 대부분의 무당이 바로 이 세습무이다.    

  

또 세습무는 남방 농경사회에서 기원을 두는 만큼 삼한에서 가야, 신라로 이어지는 남방계 무당이다. 이들은 의뢰인을 집단적으로 대하였는데, 주로 한 집안의 무당은 그가 맡은 마을이 정해져 있었다. 세습무는 무업을 제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었고, 다른 마을로 이주할 수도 없었다. 또한 자신이 맡은 마을 외에 더 많은 마을로 무업을 확대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먼저 굿하는 법을 배우고 신이 내린 뒤에 신어머니를 찾아 신내림 굿을 받는다. 본래는 이 절차가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강신무의 의례와 섞이면서 신통력을 덧보태기 위하여 추가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강신무가 먼저 신내림이 있고 난 뒤에 신어미를 찾아 굿을 배우는 것과는 순서가 반대라는 점이 특징이다.

     

무당 자신이나 의뢰인은 하나같이 무업(巫業)을 천직(天職)으로 여겼으며, 극도로 전문화되어 있는 직업이었다. 세습무를 다른 이름으로 당골, 당골래라고도 했는데, 당골은 마을의 옛 이름이기도 하고, 탕그르, 단군 등으로 풀이하여 제사장, 사제라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일단 빙의가 되면 신대를 몹시 떨거나 신대를 내려놓고 굿 보는 사람(구경꾼)을 심하게 치기도 한다. 신은 신대를 타고‘올라 오신다’고 믿고 있다. 요컨대 세습무는 집단성과 폐쇄성, 안정과 보수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 사고 구조를 지닌 무당이다.     


◇     

 이처럼 우리의 무당은 이중적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사고나 의식 또한 이중적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무속문화는 천신 하느님과 지신 땅님을 모시는 풍속이 동시에 있어왔으며, 이들은 갈등과 마찰이 아닌 조화와 화합의 구조로 하나의 문화를 이루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한국 문화의 저변에는 천신 문화와 지신 문화가 조화롭게 혼재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끝>

<주석>

* 무당 어머니의 주술(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을지라도 무업을 할 수 없었던 무당의 아들은 굿바라지를 계속해 오다가 판소리의 등장으로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대부분의 판소리 연구가들은 무당집안에서 출가한 무당의 아들들이 판소리를 처음 만들어 불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BTS 노래만큼이나 인가가 많았던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소설의 일부 대목에 시나위 조의 가락을 얹어 시장 바닥에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 판소리로 인정받은 시나위권의 중고제가 시나위(무가) 풍이 드세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초기 명창 가운데는 무당의 아들들이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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