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체라 이름할 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체는 여전히 한문체였으며, 혁명이라 할 만큼 위대하지마는 결국 한문 속의 혁명이니 말하자면 연암체는 남의 나라 말을 조선식 표현법으로 쓰는 법을 창안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과 혁명성에는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이 훨씬 나았으며 수백 년 전의 세종대왕이 더 나았고, 더 나아가서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킬만한 믿음이 있었던 교산이 가장 나았다. 저 먼 세월에 앞서 간 선각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거룩함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사람으로서, 사람은 신분으로 가르지 아니하고 사람 그대로 보아 동등하게 대하여 주는 철학인 것이다. 있는 그대로 존귀한 존재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근대 의식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하면, 연암의 근대 의식은 과연 어느 정도였겠는가?
연암이 말을 대하는 자세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신분관은 신분제를 더욱 공고하게 옹호하려는 쪽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양반전”이나 “허생전” 등은 지배층이랄 수 있는 양반들을 비판하는 소설이라고들 하지만, 정작 그 작품들은 양반답지 못한 양반을 비판함으로써 참 양반들의 기를 세워 주려는 계산이 함께 있는 것이었으며, 사농공상의 사민 가운데 농공상의 이론과 원리를 궁구해야 할 사대부들이 헛된 공부만 하면서 백성들을 돌보지 못함으로써 신분으로 맡은 바, 천직을 다하지 못하는 점을 꾸짖는 것이다. 따라서 연암은 반봉건주의자가 결코 아니며 근대 의식의 시초가 될 만한 근거가 전혀 없어 보인다. “열녀함양박씨전”에서 청상과부의 마음을 헤아려 준다고 보아 인본주의니 여권주의니 하는 해석은 미심쩍은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작품은 뒤집어서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죽은 남편을 따라 죽은 아전의 아내가 대단하다며 열녀비를 내리고 후세 사람들이 칭찬하고 있지만, 오히려 진정한 열녀는 죽지도 않고 온갖 고통을 이겨내는 사대부 부인네들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하는 이야기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더 열녀란 말인가로 들어가는 단계에서는 역시 연암은 후자를 편들고자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연암의 언어관은 한문을 숭상하고 한글을 외면한 데에서 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문 숭상이란 물론 순정문까지 포함한 말이다. 연암이 고문을 반대하고 나름대로 개혁적인 문체를 개발하고 구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점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끝내 문체를 되돌림(문체반정)으로써 스스로 자신이 비판했던 고문을 지었다 함은 그가 숭상했던 한문의 넓이가 어디까지인가를 가늠케 한다. 지금껏 우리는 연암이 문체반정 사건의 핵심에 있는 인물로서 조선 사람만의 주체적인 문체를 창출해 냈다는 소문을 들어 왔다. 그러나 사실인즉 정조대왕의 꾸지람에 꼼짝하지 못하고 “과농소초”를 순정문으로 지어 바쳐 대왕의 칭찬을 받음으로써 그나마 자존했던 연암의 연암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연암의 문체 개혁은 민족적인 견지에서 시도한 새로운 도전이기는 했으나 한문 내부에서의 개혁이었으며, 한문의 구속에서 풀려 나 한글의 값어치를 깨닫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므로, 그야말로 글말의 혁명이랄 것까지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문체적 변절은 그의 언어관이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린, 확고한 언어관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이 연암의 언어관을 바탕으로 볼 때 지금껏 알려져 왔던 연암의 여러 부면의 특징들 중에 몇 가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첫째, 연암이 시대의 선구자라는 점이다. 유교 철학이나 문학 사상은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말글을 보는 그의 의식에서만은 선각자다운 면모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연암이 아무리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고 한들, 신라 사람들의 향찰식 글말에서 보이는 민족 주체성을 따를 수는 없으며, 연암이 아무리 무지랭이 같은 불쌍한 백성을 사랑한다고 한들, 세종대왕의 백성 사랑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연암이 아무리 말과 글, 그리고 문학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고 앞섰다 한들, 반봉건적인 한글 소설을 남긴 교산의 치열함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선구자나 선각자는 역시 가장 앞서가는 사람이요 앞서서 깨닫는 자이다. 그런데 연암의 입지가 위와 같은데 말과 글을 관련하여 말할 경우, 과연 연암이 선각자요 선구자일 수 있는 것인가?
둘째, 연암이 인본주의자라는 점이다. 이 점 또한 연암은 어느 정도 한계 안에서 그러한데, 말하자면 신분제 속에서의 사람 사랑이다. 종이 종으로 태어나고, 사대부가 사대부답게 죽어가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이 없는 사람이다. 연암의 사상 가운데 인본주의를 이야기할 때 흔히 “열녀함양박씨전”을 예를 들곤 하는데, 이유인즉 견고한 조선시대의 관습에 짓눌린 과부들의 심정을 연암이 이해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에는 두 갈래의 과부가 등장하는 바, 남편을 따라 죽은 아전의 아내와 따라 죽지 않고 살아 부도를 끝까지 지키며 아들들을 참되게 교육시키고 여인네의 정을 밤새워 동전을 문지르는 것으로 이겨 온 사대부의 아내이다. 죽은 사람보다 더 괴롭지만 칭찬 받지 못하는 사대부 과부가 더 훌륭하다는 것이다. 연암은 신분제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가운데 사대부들은 실학을 철저히 궁구하고, 상민들은 열심히 땀 흘려 사대부들이 궁구한 대로 따라 생산에 힘쓰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이다. 요컨대 연암의 인본주의는 무식한 백성들을 향한 실천적인 사랑이 아니라, 우선 흐트러진 사대부들을 추스리고 그들을 타이르고 꾸짖어 일으켜서, 그 사대부들로 하여금 백성들을 돕도록 하는 매우 이론적이고 환상적인 인본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셋째, 연암이 민족주의자라는 점이다. 언어관으로 미루어 보아 연암은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모화사상의 볼모인 양 보인다. 기준을 한문에 두고 그 한문에 맞지 않는 말이라 하여 우리말을 괄시하거나 우리 나라 사람들을 깔보는 태도가 보인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한문으로 개운하게 제 뜻을 펴지 못함은 우리말을 담아내기에 한문이 부적절한 글이라서 그러한 것인데, 이상한 이론을 끌어와서 우리말과 우리 나라 사람들을 비하하는 점에서 연암이 민족주의자라는 주장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 점에서는 그의 겨레관이나 나라관에서도 잘 나타나는 바이다. 특히 한족을 향한 마음이나 명나라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반민족주의적이다.
이상으로 연암이 말을 바라보는 눈을 중심으로 하여 연암이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 보았다. 가장 오랜 동안 인상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느그림은 연암이 헤엄치고 있는 세계의 넓이이다. 그 울 안의 넓이는 신묘한 것이어서 헤엄치는 자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새 울 안은 거대한 우주처럼 넓어지고, 그 울타리에 눈길을 박은 채 그 크기를 가늠하려 하면 어느 틈엔가 헤엄치는 자가 개미처럼 작아져 보이니, 이 울타리는 아마도 연암이 숨겨 놓은 글 속의 요술봉은 아닐는지. 연암의 다른 면에 비하여, 가장 탁월한 문학적인 재능과 어처구니 없을 만치 무감각한 겨레말 사랑 사이의 부조화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지금껏 그것을 말하여 왔지만 여전히 할 말은 저물도록 남은 듯, 미지근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