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마을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처음엔 부랑자인 줄만 알았지만, 얼마 안 가 아이들은 그를 ‘연도 아제’라 불렀다. 그게 진짜 이름이었는지, 누가 붙인 별명이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다만 그 이름에는 어쩐지 길가에 버려진 연탄재처럼 부스럭거리거나, 오래된 문짝처럼 삐걱거리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
연도 아저씨는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동현이네 셋방에 얹혀살았다. 등에선 비린내가 났고, 머리는 바닷바람에 헝클어져 있었다. 손등엔 굳은살과 오래된 상처가 얽혀 있었고, 얼굴은 바람과 햇볕에 그을려 늘 검붉었다. 말은 느렸고 더듬거렸으며, 어른들에게는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했다.
어른들은 그를 보고 “좀 모자라지” 하며 혀를 찼지만, 아저씨는 늘 먼저 인사를 건넸다. 누구의 심부름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돌아오는 건 고작 밥 한 끼와 막걸리 한 잔이었다. 부두에서 물고기 상자를 나르거나, 마을 어르신들의 잔심부름으로 하루를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저씨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낡은 군복 바지, 기름때 묻은 점퍼, 비린내와 흙내가 섞인 냄새. 그런 아저씨가 우리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손에 고동이나 삶은 감자 같은 걸 쥐어 줄 때면, 우리는 말없이 그 손길을 허락했다.
어느 날이었다.
동현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야, 철민아. 연도 아제, 밤에 라디오 듣는다. 내가 들었다”
“라디오? 혹시 간첩 아이가?”
“뭐, 간첩?”
“선생님이 그랬잖아. 그런 건 간첩들이 하는 짓이라꼬.”
내 입으로 뱉은 말이었지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첩’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불씨처럼 번졌다. 교실 벽에 붙은 포스터가 떠올랐다. 불붙은 총검을 들고 검은 그림자를 쫓는 병사. ‘때려잡자, 괴뢰 간첩.’
하지만 동현이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제는 그럴 사람 아닐끼다. 니도 안 봤나? 웃을 때 눈이 초승달처럼 접히는거. 우리 볼 때마다 손도 흔들어주고, 감자도 노나주고. 그런 간첩이 어딨노?”
동현이의 말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가 비뚤게 굴러가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나에게도 연도 아저씨와 좋은 기억이 있었다. 여름날, 갯바위에서 고동을 잡다가 미끄러졌을 때였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몸이 중심을 잃고 통째로 바닷물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깊은 곳은 아니었지만, 쓰러져 물속에 잠긴 나를 억센 팔이 끌어 올렸다.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았을 때, 억센 팔 힘의 주인공이 연도 아저씨임을 알았다.
“으…읏차! 괘, 괜찮아? 아, 안 다쳤나?”
말투는 어눌하였지만 팔뚝에서는 순간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를 갯바위에 앉히고, 젖은 몸을 조심스럽게 헹궈 주던 투박한 손길. 햇볕에 탄 팔에서 땀과 바닷냄새가 섞여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저씨를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며칠 뒤였다.
“야, 큰일 났다. 연도 아제, 지서에 끌려갔단다!”
동현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뭐? 언제?”
“저녁 나절이라카는데. 진짜 간첩인가? 니가 그랬다아이가, 연도 아제 간첩일끼라고.”
말문이 막혔다. 정말 그런 말을 했던가?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다음 날 아침, 연도 아저씨는 지서에서 풀려났다. 골목에서 마주친 그는 내 눈을 피하는 듯 보였고, 누구에게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얼굴은 퀭했고,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몸이 무거워 보였다. 동현이 어머니 말로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아저씨는 사라졌다.
며칠 뒤, 동현이와 나는 마을 어귀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갈매기 울음과 뱃고동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동현이가 낮게 말했다.
“연도 아제… 진짜 안 올낀갑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맞고 틀린 것의 경계가 어지러웠다. 무엇보다, 내 말 한마디가 아저씨를 저렇게 바꾸어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마을 중앙 골목에서 발을 멈췄다. 어디선가 생선이 썩어가는 냄새가 코끝을 훅 지나갔다. 담벼락 위, 시멘트가 벗겨진 틈마다 붉은 글씨가 녹아 내리고 있었다. ‘자나 깨나 반공 방첩’
나는 그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문득, 그 문장이 피처럼 느껴졌다. 아저씨의 마음을 찢고, 흘러내린 피로 쓴 비정한 나의 글씨처럼 보였다.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게 된 이유가, 그 글씨 속에 숨어 있았다. 그 모진 해풍 속에서, 굽은 어깨를 하고 골목을 걸어서 지나가던 아저씨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는 듯했다.
나는, 그제야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연도 아제. 내가 오해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