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야기꽃

겨울 나무

by 달마루아람

유난히 함박눈이 쏟아지던 어느 겨울,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을 마무리하는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나는 바닷가 마을로 요양 온 한 젊은 형을 만났다. 그는 서울에 있는 미술 대학에 다니다 내려온 사람이었고, 이웃에 사는 내 친구의 먼 친척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폐병 환자라며 수군거렸다. 어머니는 형에게 가까이 가지 말라고 거듭 단단히 일렀다. 병이 옮을 수도 있고, 잘 모르는 사람과 얽히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금기는 온종일 어린 나를 옭아매듯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마루에 앉아 있는 형의 모습은 너무도 강렬해서 내 호기심을 쉬이 꺼지게 하지 못했다. 하얗게 숨을 내쉬며 파도와 바람을 바라보는 그의 뒷모습, 그 앞에 젖은 도화지와 떨리는 손끝. 나는 문틈 사이로 형을 훔쳐보며 수없이 마음속에서 물러서고, 다시 다가가길 반복했다. 금기를 어길까 봐 두려웠지만, 동시에 형의 그림 속에서 뭔가 비밀스럽고도 찬란한 세계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형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집 안에서 이불 속을 빠져나와 몰래 몸을 일으켰다. 문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어머니의 숨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때마다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떨림이 차올랐다. 그러나 형의 선을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은, 무섭도록 솟구쳤다.


결국 나는 몇 번이나 돌아섰다가 다시 나왔다. 하얀 눈발 속에 앉아 있는 형은,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겨울나무처럼 외롭고 단단했다. 그 순간, 나는 형이 낯설고 두려운 이방인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단 하나의 언어로 숨을 쉬는 사람이라는 걸 상상했다.


형은 늘 대청마루에 앉아 있었다. 눈송이가 그의 어깨와 도화지를 덮어도, 그는 묵묵히 붓을 들었다. 붓을 쥔 손은 마치 오래 견딘 나뭇가지처럼 가늘게 흔들렸지만, 끝내 꺾이지 않았다. 그 손끝은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한 줄기씩 가지를 그려 나갔다.


형이 그리는 선은 얼어붙은 고랑 냇물처럼 차갑고, 바람처럼 자유로웠다. 종이 위에 그려진 겨울나무의 앙상한 가지마다, 어쩐지 어떤 고통을 견뎌야만 하는 운명을 품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나무는 폭풍과 눈발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으려는 어떤 고집 같은 것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형의 선 하나하나에 시선을 빼앗기며 내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자라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 날 형은 나를 보며 낮게 웃었다.


“뭘 그렇게 빤히 보니?”


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형이 그리는 나무는… 꼭 살아 있는 것 같아요.”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붓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게 겉보기엔 죽은 거 같아도…. 실은 죽은 척하며 견디고 버티는 중이야.”


그 말은 어린 나에게 쉽게 와 닿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깊은 곳에 스며들어 남았다.

또 어느 날, 형은 작은 스케치북을 내게 내밀었다.


“눈 속에서도 숨 쉬며 버티는 나무처럼, 네 안의 믿음을 꺾지 마.”


하얀 종이들은 차갑고 묵직했다. 그것은 형이 내게 건넨 처음이자 마지막 선물이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는 책임의 무게였다. 그날 이후 나는 그림이란 삶을 담는 빛과 선의 그릇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청년 말이야, 폐병이 아니었대.”

“서울서 데모 주동했다지? 고문받고 군대까지 다녀오고… 그 몸으로 얼마나 버틴 거냐고.”

“붓 잡는 손가락까지 다 부러졌다더라.”


그 순간, 차가운 바닷바람보다 더 매서운 말들이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며칠 동안 나는 말없이, 형의 떨리던 손과 빈 마루를 떠올렸다.


몇 해가 지난 뒤, 서울에서 만난 친척을 통해 형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형은 학생운동에 몸을 던졌고, 조사실의 혹독한 밤과 군대의 외로움을 견디며 끝까지 동료들을 지켰다고 했다. 형을 버티게 한 것은 오직 자유와 사람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림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눈 내리는 바다를 떠올렸다. 형이 그리던 나무의 가지마다 스며 있던 고통과 간절함, 그리고 침묵 속에 숨겨진 신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형은 결국 고문과 군대에서 입은 상처로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내 안에서는 아직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 서 있다. 눈보라 속에서도 가지를 뻗고, 끝내 뿌리를 놓지 않는 나무.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나무의 떨리는 선들이 내 안에서 다시 피어난다. 그리고 나는 그 선들을 따라, 형이 남긴 조언과 숨결을 천천히 되새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검은 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