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암산으로 오르는 길은 올해 따라 유난히 부드러웠다. 마흔두 살의 봄, 아내와 오랜만에 시간을 맞춰 황매산 철쭉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돛대바위 아래에서 바람이 스쳤고, 우리는 서로의 손등을 맞잡았다. 아내는 웃으며 “여기, 지난번에 비 많이 오던 날 기억해?”라고 물었다.
나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아내의 웃음이 좋아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황매산 철쭉군락지는 네 군데 모두 활짝 피어 있었다. 어쩐지 예전보다 색이 더 밝은 것 같았다. 아내는 꽃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고,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우리, 이렇게 걸으니까 스무 살 때 같네.”
아내의 말이 바람 속에서 간질거렸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을 저릿하게 했다. 스무 살? 그 무렵의 우리는…
기억이 흐릿하게 끊겼다.
하산길, 모산재로 돌아와 득도 바위 근처로 내려섰을 때였다.
앞서 걷던 아내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멈춘 듯 조용했다.
“여보? 잠깐만… 어디 있어?”
나는 순결 바위 아래까지 뛰어 내려갔지만, 아내의 발자국 소리도, 숨소리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분명히…
어딘가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아들이 서 있었다.
이상하게… 아들이 중년의 나이쯤으로 보였다.
“아버지, 또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아들은 숨을 고르며 다가왔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 오래됐잖아요. 왜 자꾸…”
나는 손을 흔들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무슨 소리야, 방금까지 같이 걷고 있었어. 꽃나무를 찍는다고…”
그러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아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흔들렸다.
“아버지… 아버지는 환자세요. 병원에서 잠깐 산책 나왔다가…”
나는 숨이 턱 막히며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은, 아내가 손가락으로 종종 매만지던 그 젊은 손이 아니었다.
주름이 생겨나고, 거뭇한 반점이 피어 있었다.
“그럼… 너희 엄마는… 어디 있어?”
아들이 대답하려는 찰나, 먼 능선 끝에서 아내의 웃음소리가 아주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철쭉꽃 사이에서 뒤돌아보며 나를 부르던 모습이 순간 번쩍 떠올랐다.
그 장면은 너무 선명했지만…
아들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이십 년 전 일이고, 그냥 사고였을 뿐이에요.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엄마도 아버지 원망 안 해요. 그러니 그만 죄책감을 내려놓으세요, 제발!
아들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들은 내 어깨에 조용히 손을 올렸다.
“아버지, 돌아 가요. 혼자 산에 오르면 위험해요.”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미안해하였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나를 한번 뒤돌아본 후 사라지자, 출입문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침대에 앉아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 속엔 아직도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분명 그건 오늘의 것이었고, 동시에 오래전의 것이었다.
창밖으로 저녁 햇빛이 기울며 철쭉 빛으로 번졌다.
그 사이로 아내가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보,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