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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민 Apr 18. 2021

되살아난 솟대패의 신바람

2. 끊어진 길을 다시 잇다 <내가 읽은 책과 세상>

민속학자 ‘심우성’ 스승을 모시고 도움말을 들었던 5월 24일, 자리를 함께 했던 시민들이 비록 많지는 않았지만 ‘솟대쟁이놀이’를 되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뜻 깊은 자리였다. 노스승은 여든 살의 나이에도 아랑곳없이 솟대쟁이놀이 되살리기에 열의를 불태웠다. 그이의 값진 증언에 기대어 솟대를 몸소 타고 놀았던 솟대쟁이패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는 것만 같았다. 열일곱 살 나던 해 피난 갔다가 할아버지 댁에서 만났던 ‘정광진’ 옹의 이야기, 그에게서 전해들은 솟대쟁이패 이야기, 정노인과 함께 놀이판을 누볐던 패들과 그들끼리 주고받던 은어인 변 이야기, 송순갑 어른을 따라 진주까지 왔던 이야기 들은 어느 한 가지도 종요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 댁 노머슴으로 있었던 정노인은 합포(마산) 혹은 진양(진주) 사람으로 당시에는 몸이 온전치 못했지만, 한때는 남사당패와 솟대쟁이패의 뜬쇠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에게 물어서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정노인이 젊을 때만 해도 진주지역에서는 솟대쟁이놀이를 놀았다는 것, 솟대놀이패는 남사당패와 마찬가지로 놀이를 일곱 가지로 놀았다는 것, 가지 수는 같았지만 종목은 달랐다는 것, 같이 놀이판을 누비던 패들이 양도일, 송순갑, 최은창, 정일파 들이 있었다는 것, 이들은 노는 놀이가 조금씩 달랐어도 품앗이 하듯이 서로 드나들었다는 것 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히 양도일과 송순갑 두 어른은 젊은 민속학자에게 스승 같은 증인들이었다. 


듣는 사람이 알아듣기 어려운 이상한 말들이 증언 가운데 섞여 있어 물으니 ‘변’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솟대쟁이패 자기네끼리 주고받는 ‘은어’ 같은 것이었다. 1969년 진주에 왔다 간 뒤에 200자 원고지 22장정도 되는 분량의 ‘변’을 정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예컨대, 글박(머리), 저울(눈), 흉대(코), 스삼집(입), 스삼틀(이), 스삼통(배), 육각(손) 들이었고, 할애비(노인), 붓자(아버지), 웃마디(형), 아랫마디(동생), 스삼껏(밥), 시럭(떡), 보삼(옷), 웃보삼(두루마기), 집이(무당), 큰집이(큰무당), 당신(신당), 고장(장고) 들이 있다고 한다. 그네들이 숨김말(은어)을 썼다는 것은 그 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고, 삶이 비밀스러운 데가 있었다는 것인데, 이를 바탕으로 한층 깊이 있는 연구를 해 봄직도 할 것이다.


또 증언에 따르면 솟대쟁이놀이와 남사당놀이에 ‘넋춤(넋전춤)’이라는 게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몇 마디로 얼렁뚱땅 되는 게 아니라서 하루 날을 잡아 좀 단단히 배우기로 하였다. 7월 3일 진양호 전통예술회관에서 심우성 스승을 모시고 넋전 만들기와 넋춤을 배웠다. 이날은 진주문화연구소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대개 마루의 일꾼들이 와서 배웠다. 넋전은 본래 죽은 사람의 넋이 저승에 갈 때 노자로 쓰라고 주는 돈이다. 그러나 넋춤에서는 흔히 참종이(한지)로 오린 사람 모양을 가리켜 ‘넋전’이란 말을 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넋전을 만들 때 종이가 아래위로 죽 펴져 사람모양이 제대로 나타나고 다소의 무게감을 주려고 엉덩이 즈음에 동전을 종이로 싸서 붙이는데, 그 동전이 노잣돈을 뜻하고, 이를 일러 넋전이라 불렀다고 볼 수도 있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설명에 따라 넋전을 만들어 보았다. 참종이를 적당한 크기로 네모지게 자르되 가로보다 세로가 좀 더 길게 자른다. 세로로 세 덩이로 접은 뒤 펴서, 먼저 아래쪽 두 덩이를 아래위로 접는다. 그런 다음 맨 위쪽 머리 부분과 함께 가로로 대칭이 되도록 절반 되게 접은 뒤, 머리의 눈코입귀와 머리 테두리를 그리고, 몸뚱이의 팔다리의 밑그림을 그린 다음 밑그림에 따라 가위로 오린다. 그러고 나서 엉덩이의 맨 아래쪽에 동전을 종이로 싸서 보이지 않게 풀칠하여 붙이고, 머리의 맨 위쪽에 가는 대 쪼가리를 종이로 싸서 보이지 않게 가로로 풀칠하여 붙인 다음, 무명실을 꿰어 손잡이 대에 잇는다. 하나의 손잡이 대에 두 장의 넋전을 매달면 넋전 만들기가 끝이 난다. 이때 실의 길이는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게 하여 두 손에 들고 춤을 추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넋춤은 솟대와 솟대 줄을 타다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넋을 달래는 춤으로 넋전을 두 손에 들고 놀이의 첫 마당에 추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넋을 달래는 데에 뜻이 있지 않나 싶다. 특별난 춤사위는 따로 없고 마음 가는 대로 추면 그만이라고 한다. 또 넋춤을 바라지하는 가락은 굳이 슬프거나 느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오히려 ‘쾌지나칭칭’처럼 밝고 가벼운 가락을 자주 썼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하면서도 흥미로웠다. 어찌하여 죽은 이를 기리는 자리에서 ‘쾌지나칭칭’을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죽은 이가 살아서 재주 부릴 적에 바라지하던 가락이 이처럼 밝고 가벼웠기에 다시 한 번 신명나게 놀다가란 뜻이던가? 살다간 재주꾼의 삶이란 게 온통 위태로움과 고단함으로 무거웠기에 죽어서는 좀 가벼우라고 그랬던가? 어릴 적 할머니의 장사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밤,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 마당에서 밤이 새도록 장구 치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눈 어두운 사람이 우리 겨레의 속 깊은 바탕을 알아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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