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

나의 어린 시절

by 해송

어떻게 하다 보니, 나는 베트남에서 25년째 살게 되었다.


2000년 2월, 국내 한 기업체의 지사장으로, 호찌민으로 발령이 난 것이 베트남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지사장으로 5년, 이후 타사 법인장으로 4년을 근무하고, 아이들 교육을 위해 호찌민에 남기로 마음을 정하고 베트남에 살게 된 것이 올해로 벌써 25년째이다.


약 2년 전부터는, 호찌민시에서 차량으로 45분 정도 소요되는 동라이 (Dong Nai) 성 년짝 (Nhon Trach) 현에 위치한, 다이픅 (Dai Phuoc) 섬이란 곳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게 되었고, 현재는 대복 (大福)이란 뜻을 가진 이 다이픅 섬에서, 이런저런 일 들에서 벗어나 아내와 둘이서, 은퇴 후 베트남 살이를 하고 있다.


특별한 일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다 보니 최근 나 자신이 점점 나태해지는 것 같아, 뭔가 의미 있는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아야 될 것 같아, 은퇴 후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시간이 나는 대로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베트남 생활에 대한 소개에 앞서, 우선 베이비 부머의 한 사람으로서,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이어서, 은퇴 후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을 에세이로 기록해 봄으로써, 은퇴 후 살아가야 할 제2의 인생에 대한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고민과 대안을 함께 모색해 보고자 한다.


특정 소재에 국한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소재를 정해서 글을 쓰되, 베트남에서 실제 생활하고 있는 일상생활에 대한 소개나 이와 관련된 소재들을 주로 다루어 보고, 베트남 경제, 문화, 베트남 사람들의 성향, 부동산 등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들도 다루어 볼 생각이다. 간간이 시도 적어볼 생각이다.

글재주는 별로 없으나, 가급적 꾸밈과 과장 없이 베트남 생활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부산시 서구 충무동 5가 1번지.

내가 태어난 곳이다.

당시 “징계장”라 불리던 곳이다.

그 시절 부산의 일부 극소수 부촌 주택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주택가들이 지금 기준으로 보면 서민 주택가들이었던 시절에도, 그곳은 특히 빈민층들이 살던 곳이었다.


판잣집이라고 불리던 콧구멍만 한 우리 집 정면에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오줌통을 수시로 밖으로 던져 비우던 2층 하숙집이 위치하고 있고, 좌측에는, 집주인이 병치레를 위해 집 고양이를 고아 먹었다는 소문이 있는 집이 있고, 우측 집에는, 싸움짱이었던 우리 형이 레슬링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괴롭히던 용주라고 하는 형이, 전라도 말을 사용하던 그의 엄마와 살고 있었다.


그 동네에는 우리 또래가 몇 명 없었는데, 손찌검을 잘했던 한 살 어린 남수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성모 유치원을 다녔었는데, 가끔씩 가만히 있는 나의 얼굴을 때리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착했던 남수의 친형인 남철이 형이 동생 남수를 야단치곤 했다.

남수는 남포동에 있는 부산극장이나 제일극장에서 영화를 공짜로 관람하는 절묘한 비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모르는 어른이 표를 사서 입장할 때, 마치 그 어른이 아버지인양 바싹 따라붙어 옷자락 끝을 살짝 잡고 입장하는 방식이었는데 검표원한테 들킬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으나 성공률은 100%였다. 그러나 너무 긴장되기도 하고 큰 죄를 짓는 것 같아 두 번의 영화관람 이후 나는 그 짓을 중단했다.


우리 집 뒤쪽에는, 넝마주이들이 주워 온 많은 물건들로 언덕을 이룬 넝마주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는데, 껄렁껄렁한 인근 동네 깡패들이나 불량배들도 갈고리를 들고 다니던 동네 넝마주이 형들만은 피해 다니곤 했다.

말 안 듣는 아기들이 울고 보챌 때, 엄마들이 “넝마주이가 온다”라고 하면 울던 아기들도 울음을 뚝 그치곤 했다.


우리 집에서 하숙집을 지나면 신작로가 나왔는데, 신작로에 접해 과자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맵씨 있게 옷을 입고 다니던 원희 누나가 그 과자공장 집 딸이었다. 우리 집 바로 옆에 살던 용수형은 원희 누나가 지나갈 때면 “원흰가 번흰가”라고 하며 큰 소리로 놀려 대곤 했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신작로 인근에는 나무 판때기로 대충 만들어진 유료 공동 화장실이 있었는데, 남자와 여자 구분은 되어 있었으나, 여러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앉아서 볼일을 보는, 수십 명이 동시에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는데, 입장할 때에는 도장이 찍혀 있는 마분지 조각을 한 개 주고 입장을 하곤 했다.

휴지는 운이 좋은 날에는 날짜만 크게 적혀 있는 얇은 달력 종이 한 장을 지참하고, 보통 때는 일반 종이를 조그맣게 찢어서 가져가곤 했다.


큰 신작로 맞은편에는 기다란 통나무들을 쌓아 놓은 제재소가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은 널브러진 나무 조각들을 주워, 기다란 나무 하나에 손잡이 위치를 표시한 뒤 앞뒤 양쪽에 못으로 방어용 작은 나무조각을 박아, 칼싸움 놀이를 할 때 사용할 무기를 만들기도 했고, 통나무들 사이에 난 공간을 비밀 아지트로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후미진 통나무 공간에는 문둥이가 살고 있다는 소문도 돌곤 했는데, 통나무 위로 올라가 놀고 있으면 제재소 아저씨가 고함을 치며 잡으러 오고 우리는 높은 통나무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내리기도 했다.


제재소 바로 오른쪽에는 동양극장이란 삼류극장이 있었는데, 영문도 모르는 채 이웃에 사는 처녀 누나 손에 이끌려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관 속에서 죽었던 사람이 얼굴에 피가 묻은 채 벌떡 일어나, 놀라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보았던 그 영화는 “월하의 공동묘지”란 영화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동양극장 오른쪽에는 당시에는 꽤 큰 규모의 재래식 시장인 “골목시장”이 있었다.

그 시장에서는, 온갖 생활필수품들과 식재료들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당시 유행하는 춤이라면서 이름 모를 경쾌한 춤을 나에게 가르쳐준, 뻐드렁니가 난 성환이란 중학친구 엄마가 그곳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바닷가 방향으로 나가면 바다를 끼고 큰 얼음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큰 얼음을 기계 속에 넣으면 얼음이 잘게 부수어지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얼음 공장에서 사용한 폐수는 큰 파이프를 통해 바닷물 속으로 흘러 들어가곤 했는데, 바다와 접한 미끄러운 바닥으로 인해, 어느 날 내가 신고 있던, 몇 년 만에 명절 선물로 부모님이 사 주신 검정 고무신 한쪽이 벗겨지면서 바닷물 속으로 떠내려가는 대형사고가 난 일도 있었다. 옆에서 이를 본 3살 위의 누나는 한순간 잘못된 판단을 했었더라면 그 순간 바닷물속으로 뛰어 들 뻔했다.


우리 집과 얼음공장 사이에는 “새벽시장”이 있었다.

새벽시장에는 꼽추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반찬가게도 하나 있었는데 단팥죽도 같이 팔고 있어,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누나가 용돈으로 사 준 단팥죽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난다.


나는 송도 아랫길에 있는 인근의 하얀 등대로 놀러 가기도 했는데, 대로변에서 등대까지 가는 좁고 기다란 시멘트 포장의 등대길에는 곰장어를 파는 가게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가게 밖에는 하얀 곰장어 알과 불그레한 곰장어 껍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어른들이 버리고 간 생선 대가리를 나무막대에 묶어 바위틈 사이를 오가는 게를 유인해서 잡기도 했다. 나는, 줄낚시로 난생처음 작은 꼬시래기 1마리를 잡아, 신고 간 고무신 속에 바닷물과 함께 소중히 보관했는데, 몸부림치던 물고기가 고무신 밖으로 뛰쳐나와 바닷물 속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의 안타까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말을 조금 더듬던 춘식이라 부르던 동네 삼촌이 있었는데, 바닷가 얼음공장에서 정면으로 약 40미터가량 떨어진 바닷속 “일자 섬”까지 나를 등에 업고 헤엄쳐서 갔다 오곤 했다.

일자 섬에 업혀 간 나는, 춘식이 삼촌이 물속에서 건져 온 해삼을 맛있게 먹곤 했다. 나를 무척 귀여워했던 그 삼촌은 가끔 짐 자전거 뒤에 나를 태워 동네를 한 바퀴 돌아주기 도 했다.


일본사람으로부터 용접기술을 배우신 아버지는 당시,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환산 철공소”를 다니셨는데, 어느 날 나를 위해 조그만 보조바퀴가 양쪽에 달린 어린이용 자전거를 만들어 오셨고, 차들이 지나가면 꼬리를 물고 먼지가 하늘로 날던 신작로를 나는 신나게 달리곤 했다.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어느 날, 6 식구가 살던 판잣집인 우리 집에 불이 난 적도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황급히 달려오신 작은 아버지가 처음 보신 모습은, 고추장 단지 뚜껑을 머리 위에 둘러쓰고 고추장을 온 얼굴에 묻힌 채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나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 화재로 인해 나는 어린 시절 사진이 없다.


어느 오후 출출하던 때, 손으로 단수 (옷장) 위를 더듬던 동생 태철이 손에는 명절 때 모두 먹고 없어진 기다란 가래떡이 한 개 쥐어져 있었다. 꾀돌이 먹보 태철이가 유사시를 대비해 몰래 숨겨둔 비상식량이자 간식거리였다. 우리는 조그만 툇마루 아래에 있는 재래식 부엌의 연탄불에 먼지 낀 가래떡을 구워, 둘이서 사이좋게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우리 집에서 송도 해수욕장 방향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동네 목욕탕이 하나 있었는데, 어릴 때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 가곤 했었다. 아주머니들은 박수를 치면서 "뜨신 물 (뜨거운 물)"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 신기하게도 뜨거운 물이 둥근 욕조 속으로 보충이 되었다. 젊은 여자들은 시어머니들을 옆으로 눕히고 때를 벗겨 주기도 했다. 목욕탕 가기는 구정, 추석 등의 명절 전날 통상 이루어졌는데, 그때마다 목욕탕은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탕 안에는 동네 사람들의 몸에서 벗겨진 때들이 둥둥 떠 다녔다.

나는 7살까지 엄마와 같이 여탕에 갔었는데, 다 큰 애를 여탕에 데리고 왔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엄마한테 불평을 한 어느 날, 엄마는 아랑곳 않고 아무 말없이 나의 몸에서 연중 묵은 때를 때수건으로 2~3 차례 벗기기 시작했다. 때 벗기기를 마친, 나의 조그만 몸뚱이는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건 색으로 변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엄마 손잡고 목욕탕을 간 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영문도 모르고 장날 소 끌려가듯 친할머니한테 데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그날 이후부터는 할머니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어려운 집안 형편상 연년생 중 형인 나를 할머니께서 키우시고, 동생은 엄마가 키우면 부담이 줄어들기에, 나는 가족들이 살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홀로 지내고 계시던 친할머니 가게에 딸린 조그만 방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 5학년이 되기까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새벽 4시가 되면 조용히 일어나, 구멍가게에서 팔 물건들을 사기 위해 충무국민학교 근처에 위치한 도매시장에 가셨다가 새벽 5시가 되면 머리에 짐을 이고, 양손에 물건들을 들고서 집 앞에 오셔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시면, 잠결에도 나는 어김없이 벌떡 일어나, 잠긴 문을 열어 드리곤 했다.


같이 지낼 형제도 없고 특별한 소일거리도 없던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손님도 별로 오지 않는 구멍가게를 지켰다.

돈이 안되던 구멍가게인 듯, 할머니는 판매하는 과자는 나에게 주는 법이 없었고, 욕심이 별로 없던 나도 그다지 할머니한테 요구하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제공했던 유일한 간식은 인근 과자공장의 과자금형 테두리에 붙어 나오는 말랑말랑한 과자 뭉치들을 1달에 한두 번 사서 주신 것이었는데, 그 맛은 꿀맛과 같아 잊을 수가 없다.


할머니의 유일한 벗 이자 장난감인 나를 할머니는 내 강아지 (내 개지)라 부르시며, 나를 무척 사랑해 주셨다.

할머니는 운명하시던 한순간을 제외하곤, 돌아가실 때까지 드러내 놓고, 형제들 중에 각별히 나를 사랑해 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친할머니께서 구멍가게를 접고 작은 아버지 집으로 거처를 옮기시면서, 나도 당시 식구들이 살고 있던 남부민동 윗길에 위치한 부모님 집으로 거처를 옮기고 식구들과 같이 지내게 되었다.

남부민동 우리 집 주위 환경은 충무동 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서민층들이 모여 사는 그런 환경이었다.


어릴 때 잠시 같이 지냈던 부모님들과 형제자매들이 나와는 무관한 사람들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9살 많은 형은 나에게 전혀 무관심했고, 부모님 사랑을 독차지하던 누나도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합류 당시 막내였던 태식이는 새하얀 피부와 잘 생긴 얼굴, 귀여운 짓거리로 동네 사람들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태철이는 형인 나를 극도로 경계하는 태도였다.


IQ가 138이고 동작이 민첩했던 태철이는 엄마 심부름을 도맡아 했는데 엄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인 종호네 가게에 가 있을 정도로 동작이 빨랐는데 넉살 좋게 외상도 잘 받아왔다.

아버지는 영도에 있는 조선소로 매일 걸어서 출근을 하셨고, 어머니는 항상 쪼들리는 살림으로 식구들을 먹여 살리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키가 나보다 더 커져 버린 태철이는 한동안 나를 지켜보더니, 어느 날 형인 나에게 급기야 한 판 붙자고 한다.

여기서 지는 날이면 평생 눈치 보며 지낼 생각에 젖 먹던 (실제 엄마 젖을 태철이한테 모두 빼앗겨 나는 엄마 젖을 별로 먹지 못했다.) 힘까지 다해 겨우 이길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이런 내가 안쓰럽게 보였는지, 집 앞 자장면 집에 나만 혼자 데리고 가서 내게 자장면을 사 주셨다. 이것이 나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한 외식이었다.

아버지는 말없이 내가 먹는 모습만 지켜보고 계셨는데, 나는 난생처음 맛본 자장면이 너무 맛있어, 아버지가 자장면을 왜 한 개만 시키셨는지, 당신은 왜 안 드시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우리 집은 조그만 대문 안에 왼쪽에는 비상용 식수를 담아 놓은 철 드럼통이 하나 놓여 있고 오른쪽에는 대문 바로 옆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고 이어서 우리 식구들이 모여 지내는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입구 마루 너머 큰 방이 있었고, 그 방을 들어서면 입구에, 아버지께서 아이들보다 더 끔찍이 사랑하시는 전축과 조그만 TV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전축 옆에는 조그만 쪽 창문이 있었는데, 저 멀리 자갈치 시장 앞바다가 보였다.

나는 가끔 그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쳐다보며 바다 건너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궁금해했다.


다섯 아이들이 잠자는 그 방 건너에는 부모님이 주무시는 작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베니어 판으로 대충 만든 문으로 구분된 공간이었다.

부모님 방 앞과 마루 옆에는 입식 부엌이 있었는데, 나는 엄마가 식사 준비를 하실 때면 부엌 앞 문을 열고 무엇을 하고 있나 쳐다보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무엇이든 먹을 것을 하나 주시곤 했다.


우리 집 계단 아래 조그만 길 앞에는 가늘고 긴 고랑이 있었는데, 동네의 생활 폐수들이 흐르는 청결하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가끔 쥐들이 우리 집 마루 밑으로 숨어들기도 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빨래 줄을 연결하기 위해 사용하던, 마당에 세워진 대나무 장대를 마루 밑에 넣어 휘두르신 적이 있었는데, 마루 밑에 숨어 있는 쥐가 아버지 얼굴 옆으로 날라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쥐도 날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형제들의 덩치가 커지면서 나중에는 대문 맞은편에 조그만 공간을 활용, 방 한 개를 더 만들어 우리 형제들이 사용하기도 했는데, 형이 우리를 군기 잡을 때 사용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충무동에서 송도 해수욕장을 가는 길은 송도 윗 길과 송도 아랫 길로 가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송도 윗 길 도로상에 카도 (모퉁이, Curve에서 유래된 듯)라고 불린 버스 정류장에서 경사진 길로 조금 올라오면 3갈래 길이 나온다.

3 갈래길을 직진하면, 왼쪽 편으로 선술집이 하나 나오고, 그다음에 좌측에 나오는 계단을 가로질러 구두방이 하나 있고, 그다음 나지막한 계단 위의 우리 집이 나오고, 그다음 집은 우리 엄마가 나의 대학교 입학금 10만 원을 빌린 희태네 집이 있었다. 희태네가 이사오기 전에는 그 집에 영철이란 형과 남동생, 우리가 큰 엄마라 불렀던 아주머니가 계셨고, 얼굴이 아주 예쁜 누나도 한 명 있었는데, 영철이 형 남동생은 무슨 연유인지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이혼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옆집에는 아버지가 반주를 즐겨 드시던 이유로 매일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심부름을 하던 희섭이 집이 나란히 있었고, 그 옆집에는 희섭이와 같이 훗날 5년제 부산공전으로 진학했던 승욱이의 집이 있었는데, 승욱이의 아버지는 당시 경남도청 공무원이셨는데, 생활력이 강하셨던 승욱이 엄마는 일부 남는 방을 이용해 아가씨들한테 하숙방으로 세를 주기도 했다.


3 갈래길을 직진했을 때, 우측 편에는, 입구 쪽에서부터 태철이 친구인 종호네 구멍가게, 선술집 하던 꼬치 친구 종환이네, 동네 유일의 중국음식점, 개울 바로 옆에 위치한 아이가 없는 한 집 건너, 나중에 선화여 종고에 입학한 선화네 집, 젊은 신혼부부가 살던 집들이 차례로 있었다.


종호네 구멍가게와 종환이 집 사이로, 산복도로로 올라가는 좁고 기다란 길이 하나 나 있었다.

산복도로 길 상에는 대동 중학교 1년 선배이자 친구였던 창하 집이 있었는데, 창하 엄마가 청과물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창하는 항상 용돈이 풍부했다. 그 집에서 난생처음 주전자에 가득 담겨 있는 딸기 잼을 접하게 되었고, 창하와 함께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들이 마신 적이 있는데, 나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딸기 잼을 무척 좋아한다.

배우 이병헌을 닮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친구도 창하 집 근처에 살았었다.


3 갈래길의 좌측 길에는, 계단을 끼고 처음 나오는 왼쪽집이 아버지가 국수공장을 운영하던 한 학년 아래인 유민이 집, 계단 정상에는 몇 년 후 동아대에 입학했던 딸이 있던 약국 집, 바로 오른쪽이 성민이집이 있었는데, 중학교 진학을 하자마자 육체미 학원을 다니던 성민이는 공부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당시 동아고를 다니던 성민이 형한테 야단을 많이 들었다.


계단을 끼고 오른쪽으로는 우리 집 앞집이던 선술집인 학기네 집, 두 학년 위인 영찬이네 집, 조금 더 가면 집 구조가 미로 같았던 한 학년 위의 정섭이 집 등이 있었는데, 계속 위로 올라가면 산복도로 도로상을 달리던 35번 버스 종점이 나왔다.

성민이와 정섭이는, 배우 이병헌을 닮은 친구와 함께 3 총사를 결성하곤, 아이스께끼 (빙과류) 통을 매고 동네 아이들에게 아이스께끼를 팔기도 했던 덩치 큰 창하의 형과 3대 1로 싸움 아닌 싸움을 곧잘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는 딱지와 구슬 따먹기, 고무신 던지기, 마때 (자치기), 찜뽕 (찜뿌), 캐로마 (말타기) 등의 놀이를 주로 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놀았다. 딱지와 구슬 따먹기에서 유민이가 많이 잃는 경우에는 국수공장에서 일하는 나이 많은 형이 직접 나서 내가 딴 딱지나 구슬을 모두 다시 따서 유민이에게 돌려주곤 했다.


l 고무신 던지기: 고무신을 딱지치기하듯 내려친 뒤 상대방 고무신을 뒤집으면 이기고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고무신을 멀리 던져 주워 오도록 하는 게임

l 마때 (자치기): 마당에서 긴 막대기로 요철이 조금 만들어진 짤막한 나무토막을 치며 노는 놀이, 긴 막대기로 짤막한 나무토막을 쳐서 날아간 거리를 재어 승부를 정하는 게임

l 찜뽕 (찜뿌): 야구와 비슷하나 투수나 포수, 배트나 글러브 없이 타자가 말랑말랑한 고무공을 스스로 공중에 띄운 뒤 맨주먹으로 치고 1루, 2루를 돌아 홈으로 돌아옴. 타자가 “됐나?”라고 외치면, 수비가 “됐다”라고 하면 타자가 공을 쳐서 공격을 함.

l 캐로마 (말타기): 두 팀으로 나누어, 진 팀 아이 중 한 명은 벽에 기대어 수직으로 서 있고, 두 번째 아이가 서 있는 아이 다리사이에 머리를 넣고 등을 대고 있으면, 다음 아이들은 앞 아이들의 엉덩이 밑 다리 사이로 머리를 넣은 형태로 말처럼 길게 등을 하늘로 대고 있으면, 이긴 팀 아이들이 차례로 멀리서 뛰어와 수비하는 아이들의 등 위로 날아올라 타는 놀이. 수비하는 아이들이 무너지면 다시 한번 공격을 함.


이즈음 방과 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길에 있는 5원짜리 동전을 하나 주웠다.

5원이면 그 당시에도 사실 큰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잠깐의 갈등 끝에, 나는 길목에 있는 파출소에 들어가서 순경에게 주운 5원을 신고했다. 순경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고서 나를 돌려보내면서 동시에 그 5원짜리 동전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순경들을 좋은 눈으로 보지 않았다.


하루는 친하게 지내던 윗동네 상철이 집에서 자게 되었다. 키가 나보다 훨씬 컸던 상철이의 엄마는 가끔 쑥떡을 만들어 주셨는데, 처음으로 먹어본 쑥떡 맛은 군것질 거리가 많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는 꿀맛이었다.

상철이 엄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조용한 분이셨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싸우는 듯한 소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가 보니, 상철이 엄마가 이웃집 엄마와 언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는 상철이 엄마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심한 상스러운 욕설들을 듣게 되었고 너무 놀랐다.

그 사건 이후, 나는 상철이 집에 더 이상 놀러 가지 않았고, 그때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모든 종교를 좋게 보는 입장인데, 기독교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시각은 그때 그 사건이 영향을 준 것은 맞는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에는, 여름에는 주로 인근 송도 해수욕장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고, 다른 계절에는 주로 동네 친구들과 축구, 야구 등을 하며 놀았다.


여름철에는,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나는 하교하자마자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동네아이들과 함께 속옷차림의 맨발로 송도 해수욕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동네 형들은 양손으로 노를 젓는 나무 보트에 태워 준다고 바람을 잡은 뒤, 어린 우리들을 깊은 바다에 빠뜨리곤 배를 저어 도망을 가면, 수영을 하지 못하던 우리는 물에 빠져 죽을 까봐 온몸을 휘저으며 눈앞에 있는 보트를 쫓아가서 매달리려고 하고, 형들은 더 빠른 속도로 도망을 가곤 하면서 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바다 수영을 자연스레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옷 맡길 돈이 없던 우리는, 가위 바위 보로 순번을 정한 뒤, 차례로 입고 간 속옷 무덤을 지키자는 약속과 함께 보초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바닷물로 뛰어들었는데, 다음 보초가 나타날 시각이 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수영을 하고 싶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보초 친구는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서 옷들을 묻어 놓고 그 위에 아이스께키 (빙과류) 막대로 나름의 표식을 한 뒤 바닷물로 풍덩 입수를 했는데, 명절에 큰 맘먹고 부모님들이 사 주신 속옷들을 잃어버린 동네 아이들 집집마다, 비명소리로 인해 그날 저녁 동네 전체가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새롭다.


중학교 진학에 필요한 체력장 연습을 하기 위해 송도 해수욕장을 찾기도 했던 우리는, 텃세 부리던 그 동네 깡패들에게 가끔 붙잡혀 돈을 빼앗기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는 아주 특별한 부잣집이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박정희와 육사동기로, 소장으로 예편했다고 하는 당시 부산위생주식회사 사장 집과 아피스 만년필 사장 집이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부산위생주식회사 사장 집을 똥 사장 집이라고 불렀는데, 정기적으로 집집마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을 퍼 나르던 부산위생주식회사 1번 번호를 단 차량들이 모두 그 집 소속이라고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치억"이란 이름의 그 집 큰 아들은 당시 대동고등학교 핸드볼 선수였는데, 어느 날 송도 해수욕장 깡패들과 부딪히는 일이 있었다.

그 형을 만난 송도 깡패들이 그 형을 뒷골목으로 데리고 가려는 찰나, 순식간에 그곳을 벗어난 그 형은 옷을 입은 채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어 멋진 수영실력을 보이며 바다 한가운데 위치한 다이빙 대로 도망을 갔는데, 물개처럼 수영을 잘하는 그 동네 깡패들이 무리를 지어 다이빙 대로 향하면서 결국 그 형은 모래사장을 거쳐 후미진 골목으로 붙잡혀 갔다. 큰일이 벌어질 것이란 우려 속에 지켜보던 우리들의 예상과 달리, 치억이 형은 깡패들의 신경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의 몇 마디 이야기를 끝내는 순간, 핸드볼 선수다운 엄청난 속도로 그곳을 벗어나고 그 형을 쫓던 그 동네 깡패들은 얼마 달리지 못하고 닭 쫓던 개 마냥 멍한 눈빛만 보이고 있었다.


그 부잣집에는 당시 송도중학교 레슬링 선수로 알려진 치용이라는 둘째 아들 아래로, 남부민 국민학교 동기인 명옥이란 여자아이도 있었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남부민동 일대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대궐 같은 규모의 그 저택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는데, 큰 호두나무 한 그루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들과 푸르른 넓은 정원이 큰 연못과 함께 조성이 되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특히 내가 놀랐던 것은 그 집안에는 앉아서 볼 일을 보는 변기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러한 변기의 구조에 대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새벽부터 집에 있는 양철 바케스 (양동이) 두세 개를 갖다가 줄 세워 기다리면, 동네에 정기적으로 오는 물 차가 나타나고, 동네사람들은 그 물차로부터 마시는 물을 공급받았다. 동네사람들은 똥 사장 집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빨래를 하기도 하고, 트럭으로 싣고 와 버스 정류장 아래쪽 언덕에 한 번씩 버리는 그 집 호두들을 동네 아이들은 주워 먹기도 하였다.


글러브가 귀했던 시절, 우연히도 야구를 즐겨했던 나는, 철사와 노끈으로 얼키설키 엮은 야구 글러브를 어디에선가 구해, 동네 친구들과 야구 경기를 즐기곤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창하는 지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팔 힘이 무척 강해 우리 팀에서 투수를 맡았던 창하는 컨트롤은 다소 문제가 있었지만 탁월한 강속구로 산 동네 팀 아이들의 기를 죽이고, 우리 팀은 돈내기 시합에서 산 동네팀을 이기곤 했다.

시합을 위한 자금 조달은 주로 용돈이 풍부했던 창하와 유민이가 담당했다.


산 동네 아이들은 자신들이 강세를 보이던 축구 시합을 통해 야구 시합에서 빼앗긴 돈을 다시 찾곤 했다. 야구 시합은 주로 동네 공터에서, 축구 시합은 천마산 공동묘지 넘어 위치한 고려신학대학에서 주로 열렸다.

우리는 축구도 이기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동생 태철이는 축구 시합이 있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축구장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기다리다 나한테 야단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전력 보강이 절실히 필요했던 우리 팀 아이들은 태철이를 끼워 넣자는 강력한 압력을 나에게 행사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는 태철이도 같이 경기를 뛰게 했는데, 솔직히 당시 나보다 축구 실력이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이 들어, 태철이와는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는 사이다.

정식 축구 시합에서 지면, 열받은 창하는 페널티 킥만으로 다시 돈내기 시합을 하자고 하곤, 골키퍼를 자청해 몸을 날리곤 했지만, 우리 팀의 실력이 아무래도 다소 부족했다.


한 번은 하얀 등대를 지나 해양고등학교를 거쳐 송도 거북섬이 나오기 전에 나오는 공터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 공터에는 고장 난 크고 둥근 놀이기구가 하나 있었는데, 10개 남짓 차례로 매달려 있는 문이 달린 좌석마다 어린아이들이 착석하고 그 놀이기구 관리인이 그 기구를 작동하면 매달린 좌석들이 천천히 위. 아래로 한 바퀴 회전하면서 내려오곤 하는 기구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 그 기구는 문과 좌석이 모두 부서져 없어지고 군데군데 녹도 많이 슬어 있었다.

고장 난 그 기구에 나를 태운 짓궂은 나이 많은 동네 친구들이 꽤 높은 곳까지 그 기구를 밀어 올린 뒤 내려 주지 않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문도 없이 개방된 좌석 구조물에 겨우 매달려 있던 나는 팔에 힘이 빠지면서 마지막으로 울부짖음을 동반한 애원을 할 수밖에 없었고, 땅으로 수직 낙하하기 일보 직전 에야 가까스로 내려올 수 있었다. 큰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남부민 국민학교는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운영되고 있었는데, 한 학년에 12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는 80명의 학생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옹기종기 앉아 공부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시절, 기계 체조부를 맡고 있던 성수석 담임 선생님은, 키가 작아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수업 중 수시로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나는 4~6학년 교실들을 돌며 선생님의 메모를 전달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시합을 마친 기계 체조부 선수들을 격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른 친구 1명과 함께 점심시간에 급식을 배급하기도 했는데, 들고 온 급식 통에는 네모난 빵과 우유가 담겨 있었는데, 가끔 1~2개 정도의 여유분 빵이 발견되어 친구와 함께 나누어 집에 가져가는 자그마한 즐거움도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엄마의 지시에 따라 1명 분만 급식을 신청한 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생 태철이와 급식을 나누어 먹었는데, 친구들과 축구를 하느라 제때에 우리 반 교실로 올라오지 못한 태철이를 기다리느라 점심식사를 하지 못해 애를 태운 적도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송도 방향의 산복도로 윗동네에는, 규태, 형신이, 현우, 찬근이, 남준이 등 초등학교 동기들이 많이 살았는데, 산복도로 입구 쪽에 오글오글 몰려 살았다. 훗날 경남상고와 롯데 자이언츠에서 야구 선수를 하던 재상이는 당시 조금 더 위에 있는 산 동네에 살았는데, 철사로 얽어 멘 야구 글러브로 가끔 나와 캐치볼을 하기도 했는데, 던지는 볼은 빠르면서도 묵직했다. 초등학교 시절, 체육시간에 다른 아이들은 매트 위에서 구르기를 할 때, 육상선수이기도 한 재상이는 기계 체조 선수들처럼, 뛰어올라 공중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고 착지하는 텀블링의 묘기를 보여 주는 등 탁월한 운동 신경을 자랑하곤 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금요일마다 합동체육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남. 여학생들이 짝이 되어 손을 잡고 댄스를 추기도 했다. 숫기가 없는 나는 수줍음에 학교 운동장 후미진 곳으로 도망치기도 했는데, 정작 수줍어해야 될 여학생들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한 번씩 쥐 잡기 행사도 벌였는데, 그럴 경우에는 동네별로 쥐 소탕 작전이 전개되고 집집마다 쥐 틀에 쥐약을 묻힌 유인물을 놓고 쥐 잡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은 증거물로 쥐꼬리를 끊어 학교에 제출해야 되었다. 누나는 수리미 (오징어) 다리에 먹물을 적당히 묻혀 학교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우리 집에서 송도 아랫길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원삼이 집이 있었는데, 원삼이 아버지는 상이용사 출신으로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는데, 원삼이는 수시로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청산유수의 말주변으로 우리 집 식구들을 웃기곤 했다.


방과 후 무료로 운영되던 학교 주산반에서 원삼이는 나와 같이 주산 연습을 하곤 했고, 주산 문제집과 부기 문제집을 사기 위해 공해가 아주 심한 영주터널을 거쳐 부산역 인근 문제집을 판매하는 곳을 같이 다녔다. 그때 나는 주산 2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주산 연습은, 주로 박상옥 선생님이 빠르게 불러 주시는 숫자들을 주판에 놓은 호산 연습과, 문제집에 적혀 있는 긴 숫자들을 2줄씩 더해 나가면서 주판을 놓는 연습,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전표에 적힌 숫자들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더하는 전표 산 연습과 더불어, 긴 숫자들을 눈으로 읽으며 계산해 내려가는 암산 연습을 하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나는 우연한 기회에 조선일보가 주최한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었는데, 난생처음 전교생이 모인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호명이 되어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상장을 들고 간 나는 기쁜 마음에 부모님께 그 상장을 드렸는데, 생업에 바쁘셨던 부모님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크게 기뻐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나의 글은 대충, “어른들은 돈에 울고 돈에 웃는다. 퇴근 후 우리 동네 대폿집에 들리시는 선생님들도 돈이 안주인 것 같다. 우리 집도 매일 돈 때문에 걱정이 많다. 나는 돈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내용의 글이었던 것 같다.


(계속)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한 베이비 부머의 호찌민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