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등학교 시절 (1)
1974년 나는 대연동 황령산 자락에 위치한 부산 중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교 평준화 정책에 따라, 우리 학년은 서울과 부산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추첨 방식에 의해 학교를 배정받았는데, 남부민동에 살던 나는 재수가 없게도 “공동학군”인 원거리의 부산 중앙고등학교에 배정된 것이다.
남부민동에 살던 나는 대연동에 있는 학교를 가기 위해 중간에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다시 가야 했다.
고교 뺑뺑이 1회인 우리 학년이 그 유명한 “58 개띠” 학년이다.
1955년부터 1963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 부머 세대라고 불렀는데, 베이비 부머 세대중에서도 가장 인구가 많은 해가 1958년 개띠해에 태어난 “58 개띠”들이다.
“58 개띠”들은 이제 60대 중반이 지난 나이지만, 6.25 전쟁 후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학창 시절과 직장, 결혼 등의 성장과정을 거치며 가장 치열한 경쟁을 겼었던 동년배들이며, 대한민국 발전에 큰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배정받자마자, 엄마가 서두르신 일이 하나 있었다.
나도 몰래,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있는 집을 찾는 일이었다.
어느 날, 엄마는 검은색 고등학교 교복을 한 벌 들고 오셨다. 그 옷은 보기에도 많이 입어 헌 옷 느낌이 팍 났다.
기분이 상했지만, 나는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부모님이 바라시던 상고 대신 인문계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된 미안한 마음 때문에, 그 헌 교복에 대해 불평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 교복을 입었던 부산대 의대에 입학한 형은, 경남고등학교를 다녔기에, 우리 학교와 이름표 부착 위치가 반대였다.
2~3년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는 그 검은색 교복의 왼쪽 가슴팍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던 자욱이 하얗게 남아 있었는데, 나는 오른쪽 가슴팍에 우리 학교 이름표를 부착해야만 되었다.
억장이 무너졌다.
입학식 날, 의아하게 쳐다보던 한 친구가 물었다. “네 교복은 좀 이상하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뭐라고 말을 해야 되나?
“내가 너무 좋아하는 우리 형이 입던 교복이라서, 새 교복을 사는 대신 형의 교복을 입기로 했다.”
창피한 마음을 감추고,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나의 대답이었다.
그 대답은, 자칫하면 내가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와 함께 열등의식에 사로잡힐 수도 있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순발력 있는 괜찮은 답변이었던 것 같다.
부산 중앙고등학교는 신설 공립고등학교로 우리가 2회였는데, 우리의 유일한 한 해 위 선배들은 마지막 고교 입학시험을 거쳐 들어온 선배들이었다.
1년 선배들은 툭하면 유일한 후배인 우리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군기를 잡곤 했다.
선생님들의 제지나 만류에도 한 회 위 선배들은, 신설 고등학교에서 훌륭한 전통을 만들어야 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기도 했고, 선생님들도 때론 모른 채 했다.
우리는 경남고나 부산고에 떨어지고 온 주제에, 추첨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입학한 후배들을 괴롭힌다고 선배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별 다른 해결책이 없었다.
신설학교 학생들인 우리는, 체육시간만 되면, 돌덩이 투성이었던 운동장에서 굵은 돌을 골라내어 평평한 운동장으로 만드는 공사가 수업 자체인 경우들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님들 중에는 전통을 세우는 일에 적극 협조하는 차원으로, 열성을 가지고 우리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계셨다.
조례시간에는, 직전에 경남고 교장에서 우리 학교 교장으로 전근 오신 달변가 주상우 교장선생님의 긴 훈시를, 우리는 늘 예외 없이 들어야 했다. 여름철에는 긴 훈시를 듣다가 쓰러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30~40분간 진행된 훈시 마지막에 “그럼 마지막으로 간단히 7가지만 이야기하고 오늘훈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셔서 우리를 당황케 만드는 재주를 가지셨다.
교련 선생님은 군 출신답게 군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개빼 (개뼈)라는 별명을 가진 체육선생님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조례시간과 교련시간, 체육시간에 서로 군기를 잡곤 하셨다.
신설학교라 그런지 초임 선생님들도 좀 있었는데, 키가 아주 작았던 초임 독일어 선생님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긴 작대기 몽둥이를 휘두르며 수업을 진행하시곤 했다. 지각한 학생들에게 빠따 (몽둥이로 엉덩이 때리기)를 치곤 하셨던 상업 선생님도 신설학교에 대한 애정이 무척 강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 짝이었던 영호는, 형이 경남고를 거쳐 당시 서울법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과거 경남고등학교에서 영호 형을 가르쳤던 화학 선생님은 영호에게 가끔 형의 근황을 물으시곤 했다. 그것도 수업시간 도중에 수업을 진행하시다 말고, 모든 반 친구들 앞에서 대 놓고 물으실 만큼 영호 형을, 본인의 큰 자랑거리로 생각하셨다.
누나의 과거 고등학교 담임이자 역사 선생님이셨던 류병도 담임선생님은, 가정방문을 마친 뒤 어려운 우리 집 형편을 이해하시고, 내가 상대적으로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던 수학 성적을 올리라는 의미로, 아침 자습시간에 내 자리 옆을 지나치시면서 수학 참고서 하나를 내 책상 위에 슬쩍 던져 놓고 가셨다. 그 깊은 배려의 마음이 너무 고맙게 느껴졌다.
어느 날, 동래 식물원에서 임간(林間) 학교가 열렸는데, 머리 아픈 학교 교정에서 벗어나 숲 속에서 하루 야외 수업 겸 휴식을 취하는 행사로 글짓기 대회가 있었고, 시 한수를 지어 제출한 나는 기대도 하지 않은 상을 받았는데, 류 선생님이 아주 기뻐하셨다.
나는, 고교시절 3년 동안 같은 반 친구였던, 당감동에 사는 욱재와 가장 가까이 지냈는데, 어느 날 우리에게 다가온 영석이 하고도 같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우리는 수정동에 사는 영석이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는데, 나는 공부방이 있는 영석이가 참 부러웠다.
얼굴이 좀 검었던 우리는 “깜상 삼총사”였는데, 기환이는 우리 때문에 학교 전기료가 많이 나온다고 우리에게 농담을 하곤 했다.
나는 일요일에도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공부를 아주 잘하던 호찬이와는 가끔 학교 운동장 모서리에서 야구 캐치볼은 하기도 했다. 호찬이는 바둑도 잘 두었는데 대연동에 있는 호찬이 집에 가서 바둑을 두기도 하고, 못골 시장 앞에 있는 탁구장에서 탁구를 치면서 고교시절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였다.
중앙고에는 유일한 운동부인 농구부가 있어, 동아고와 시합이 있을 때에는 전교생이 구덕 공설운동장에 가서 응원을 하기도 했다. 운동장 위 조그만 공터에는 농구 골대가 있어 농구를 잘하던 영석, 기환, 석환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농구를 즐기곤 했는데 이 친구들은 레이업 슛을 유연하게 하는 등 꽤 수준급의 실력을 보여 주곤 했었던 기억이 난다.
집에 경제적 여유가 있던 3학년 짝 춘식은, 도시락 반찬으로 매일 소시지와 소고기 장조림 반찬을 가져와, 매일 김치만 가져고 오는 나와는 비교가 되었는데, 춘식이는 소시지나 소고기 장조림을 흔쾌히 나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생이 동아고 농구선수였던, 춘식이는 ” 라도”라는 아버지 외제 시계를 보여주며 아주 비싼 시계라고 자랑하기도 하고, 학교 근처 "할매집"에서 담배 피우며 소주 마신 이야기며, 껄렁한 한 해 후배를 잡아 때리다 실수로 한쪽 눈을 크게 다치게 만들어 골치 아프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는데, 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신기하게 듣고 있었다. 훗날 박사 학위 취득 후, 대학 교수를 하던 춘식은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