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베트남 호찌민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 우리 가족은 사이공 강가 나지막한 아파트에 살았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아들과 딸에게는 한 가지 오랜 희망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우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공간적인 제약도 있었지만, 더 큰 난관은 장모님의 강력한 반대였다.
당시 10년 넘게 모셔온 70세 장모님의 의견은, 매 순간 의사결정에서 내가 최우선으로 반영해 온 터였다.
2년 정도가 흘러, 아내는 아이들에게 더 넓은 공간을 주고 싶었기에, 우리는 개인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마당에 적당한 크기의 정원이 있고, 잭 프룻 (Jack Fruit, Quả mít), 구아바 (Guava, Ổi) 등의 과일나무도 있는 2층 집이었다.
아이들은 큰 집으로 이사 간다는 기쁨은 있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강아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 아이들에게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제는 강아지들을 키울 물리적 공간도 충분히 확보되었다.
한 번도 엄마 의견에 토를 달지 않던 아내가, 처음으로 장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갖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소망을 들어주자고.
장모님도 그동안 손자. 손녀에게 미안했던지 어렵사리 승낙을 하셨다.
마침, 이웃으로부터 우리나라 진돗개와 베트남 진돗개 격인 푸궉 (Phú Quốc) 개 사이에 태어난 황색 강아지 1마리 (이름: 키키)와 코커스패니얼 (Cocker Spaniel) 1마리 (이름: 해피)를 동시에 얻는 행운이 따랐다.
강아지 2마리를 마주한 그 순간부터, 우리 아이들의 얼굴에는 함박미소가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키키는 멀리서 오는 우리 차 소리만 들어도 짖기 시작할 정도로 영민했고, 해피는 에너지가 넘쳐 지칠 줄 몰랐다. 아이들은 하교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강아지 2마리부터 찾았다. 그런 아이들 덕분에, 강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도 강아지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방학이 되면, 가족들은 모두 한국으로 떠나고 나만 홀로 남았는데, 퇴근 후 누구보다도 나를 반기는 이는 다름 아닌 키키와 해피였다. 나중에 해피는 안타깝게도 새끼 8마리를 낳고, 아이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이후 사정상 다시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우리 가족은 남은 이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고, 단독주택에서 또 다른 강아지들을 키우기도 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키키와 해피를 키우면서 지내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은 성장해서 우리 곁을 떠났고 호찌민에는 우리 부부만 남았다.
재작년 7월 말 경 어느 날, 아침 산책길에 바싹 마른 검은 개 한 마리를 만났다.
개가 드문 동네에서 만난 낯선 개였다. 며칠을 굶었는지 배 가죽이 등에 거의 붙어 있었다.
우리 단지 밖 마을에 흔히 돌아다니는 종류의 개였다. 아마도 그곳에서 수 Km 떨어진 이곳으로 어쩌다가 오게 된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 음식을 가지고 그 개를 만났던 곳으로 가 보았다. 없었다.
다음 날 산책길에 같은 장소를 지나는데 그 검은 개가 다시 보였다.
집에서 음식을 가져가 보니,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잽싸게 도망간다.
가지고 간 음식을 그 장소에 두고, 멀리 가서 지켜보니 그 근처에 오지도 않는다.
다음 날에는 그 장소부터 가서 음식을 두고 왔다. 1시간쯤 뒤에 동일 장소에 가 보니 음식이 사라졌다. 멀리서 숨어서 지켜보다가 내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그곳에 둔 음식을 먹은 것이다.
그날 이후 그 개는 그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음식을 가져다 두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내가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내가 다가가면 여전히 쏜살같이 도망간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대단하다.
며칠이 지나고 나니, 내가 둔 음식에서 보일 정도로 물러나 있어도 경계심을 조금 풀고 눈치를 보면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또 며칠이 지나고 나니, 이제 내가 가까이 있어도 경계는 하지만 도망갈 마음은 없는 듯했다.
다음 날은 경계심을 풀고 내 옆에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은 뒤,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따라오는 듯하더니 사라진다.
다음 날,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아침에 산책을 나가려고 하는데, 대문 근처에 그 개가 앉아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린 듯이.
내가 산책을 시작하자, 조금 거리를 두고 나를 따라오기 시작한다.
그다음 날부터는 여지없이 우리 집 대문 앞에 세워 둔 차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 부부는 어느 집 개인지도 모르는 이 검은 개가 주인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필요한 음식을 주는 정도의 관계로 우리의 관계를 설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 집 주차장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고 떠나질 않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의지와 전혀 무관하게 그 개는 우리 집 반려견이 되어 버렸다.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신우는, 8월 말 베트남을 방문하신 장모님께도 귀여움을 받기 시작했고, 1달 정도 머무시는 일정동안 장모님께 큰 즐거움을 드렸다.
그런데, 10월 우리 부부의 미국 방문 계획이 잡히면서, 서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집을 비우는 동안, 음식을 줄 사람이 없었다.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아, 며칠 동안 독한 마음을 먹고, 음식을 주지 않고 몰래 지켜보기도 했다.
식사시간이 되면, 어디에서 음식을 얻어먹는지 마는지, 자리를 잠시 비우기도 했지만, 그 개는 우리 집을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는 듯 다시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우리는, 10월 12일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그 개가 당초의 주인집을 찾아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여행 초기 가끔 걱정은 되었으나, 우리는 개에 대한 걱정은 잊은 채 미국과 유럽 여행을 마치고 11월 7일 호찌민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그 개는 여전히 우리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개가 평소에는 전혀 가지 않던 우리 집 담벼락 주변을 자주 왔다 갔다 한다.
소시지를 몇 개 주었더니, 마당 잔디를 파헤쳐 흙 속에 소시지를 묻기도 한다. 보지 못한 행동이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해당 담벼락 주위로 가 보니, 담벼락 아래 흙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흙더미 옆에는 조그만 동굴이 파여 있었는데, 그 속에서 자그마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강아지 울음소리였다.
우리의 부재중에 새끼를 낳아, 그 동굴에서 새끼를 키워 왔던 것이다.
담벼락 근처를 왔다 갔다 한 것은 우리에게 새끼를 낳은 것을 알려주려는 신호였던 것이다.
눈치 빠른 아내가, 한치 망설임도 없이 서둘러 조그만 동굴 안으로 팔을 넣더니, 새끼를 한 마리씩 꺼내는데, 무려 5마리나 되었다. 어미 개가 근 한 달간, 사람 도움 일체 없이 스스로 새끼 5마리를 낳고 키워왔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 개가 그동안 밥은 어떻게 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 의문이 해소되었다.
어느 날 주택 단지 내 우리 집 인근을 청소하는 베트남 청소부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없는 동안 개 밥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너무 고마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조금의 사례를 하니, 알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흡족해한다.
다음 날 다른 청소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자신도 개 밥을 챙겨 주었다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한다. 고맙다고 또 사례를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대신, 개밥을 챙겨 주신 분들은 동네 청소하시는 분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만남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의미에서 그 개 이름을 “신우 (新友)”라고 지어 주었다.
신우와의 만남 초기부터 스토리를 소상히 알고 있던 우리 아들과 딸은, 이 놀라운 사실들에 대해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신우에 대한 작명과 강아지 5마리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강아지 5마리는 우리 모두의 축하와 관심 속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신우가 낳은 강아지 5마리를 보는 것은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우리가 사이공으로 마실 가는 날이면, 신우는 어김없이 선착장으로 가는 우리 차 뒤를 쏜살같이 따라달려, 거의 같은 시각에 선착장으로 와 있었고, 저녁에는 선착장 주차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11월 말경, 한국에 계신 장모님이 낙상 후 고관절을 크게 다치신 일이 발생했다.
12월 초 우리는 또다시 한국에 가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
신우와 강아지 4마리 (1마리는 중간에 숨짐)가 걱정이 되었다.
앞으로 장모님 돌보는 일로, 베트남을 떠나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았다.
이웃에 살면서 가깝게 지내던 프랑스 부부를 통해, 호찌민에 반려견들을 해외 입양시켜 주는 미국인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즉시 연락을 취했다.
신우와 강아지 4마리 모두 해외 입양을 해 주겠다고 한다. 너무 고마웠다.
만날 날을 잡고, 신우 가족을 데려가니, 수의사가 검진 후 신우의 가벼운 외상에 대한 치료까지 해준다.
친절하게도 강아지들에 대한 예방 접종도 해준다.
입양 기관의 미국인 여자분한테 신우 가족을 정중히 부탁하고 인계를 완료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얼마 후 해외 입양을 기다리는 신우 가족사진을 보내왔다. 모두 건강한 얼굴이다.
우리는 장모님 임종 순간까지 한국에 머무느라, 이후 소식은 듣지 못했다.
가끔 길에서 만나는 개들을 볼 때마다 신우가 생각난다.
신우와 새끼 강아지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던 우리의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고, 그것도 운명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