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학교 시절
1974년, 나는 추첨에 의해 대신동에 있는 대동중학교에 배정되었다.
과거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는데, 우리 한해 위 학년부터는 중학교가, 우리 학년부터는 고등학교가 무시험 추첨제도로 바뀌었다.
무시험 추첨제도는 “뺑뺑이”라고도 불린 추첨제도로서, 학생들이 차례로 밀폐된 통 안에 있는 구슬을 한 개씩 뽑고 그 구슬에 적혀 있는 번호에 배정되는 학교로 시험 없이 입학하는 방식으로서, 이 제도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소위 명문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치열한 입시 경쟁이 없어졌다.
사람들은, 무시험 추첨제도 도입 이후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을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 무시험 추첨제도로 인해 학생들 간의 치열한 입시 경쟁이 없어지는 반면, 학생들의 학습 능력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그 당시 우리와 같은 학년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을 배려하기 위해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중 1 때에는, 반에서 키가 자그마한 박상진, 정무석, 김병곤 등과 함께 앞줄에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방과 후에는, 야구공 만한 조그만 하얀 고무공으로 농구 골대 아래에 나 있는 네모 모양의 틀에 골을 넣는 약식 축구를, 해 저물도록 즐기곤 했다.
운동장을 같이 사용하던 대동고 형들은 가끔 중학생들을 잡아,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고 하면 소개해 달라는 짓궂은 장난을 하곤 했는데, 어느 날 등교를 하는데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진 양, 고등학교 형들이 삼삼 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대동고 형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는데, 대화 내용은 드디어 대동고에서 예비고사 합격자가 나왔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는 해낼 줄 알았어!, 역시 대단한 친구야!”
당시 대학교 입학시험은 예비고사와 본고사로 나누어 시행되고 있었는데, 예비고사는 대학교를 입학했을 때 큰 문제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점수를 획득하기 위한 시험이고, 각 대학마다 비중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거의 절대적인 비중으로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본고사는 영어. 수학. 국어 3과목이 본고사 과목으로,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학생들은 거의 절대적인 시간을 이 세 가지 전략과목 공부에 매달리게 되었다.
예비고사는 고등학교 졸업자는 거의 모두 합격을 했는데, 취득 점수는 대학교에 따라, 10~30% 정도 비중으로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 재단에서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그 당시의 대동고는 입학 학생 수를 맞추기 위해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진 학생들과 동네 껄렁껄렁한 학생들을 원하는 대로 모두 입학시킨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우리는 “역시 대동고!”라며 깔깔대며 웃었다.
중학교 1학년 초에는, 엄마가 청과물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창하가 아침마다 우리 집에 왔고, 등. 하굣길을 같이 걸어 다니며 노상에 있던 뽑기들을 즐기면서 노느라 첫 시험에서 1학년에서 유일한 특별반이었던 우리 반 60명 중 45등을 기록했지만 한 순간 좀 창피했을 따름이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어느 날 전교 2등을 하던 충범과 우연히 같은 16번 버스를 타고 하교를 하다, 처음으로 충범이와 대화를 나누게 되고, 순간적으로 충범이로부터 들었던 충격적인 말로 인해,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이 철이 들어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낸 충범이는 무언가 크게 깨달은 듯, 심각한 얼굴로 “내가 그동안 너무 철이 없었다. 병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는 내가 공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큰 소리로 공부할 필요 없다. 나가서 놀아라. 건강이 최고다.라고 강요를 하시곤 해서, 그때마다 내키지는 않지만 나가서 놀 곤 했는데, 내가 어리석었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충범이의 태도에 정말로 철이 없었던 나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된 직후, 친구들도 사귀고 그 친구들 집에도 가서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동래 식물원 위쪽에 위치한 2층 단독주택에 살고 있던 채홍이 집에는 주차장 안에 탁구대가 있어서 채홍이와 탁구를 치기도 했는데, 집 앞마당에는 테니스 코트도 있어 나는 많이 놀랐다.
동훈이 부모님은 냉면집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동훈이 전용의 아담한 공부방이 부러웠다. 연대 의대로 진학한 뒤 의사가 된 동훈이 집에서 난생처음으로 냉면을 먹어 보았는데 냉면이 이빨로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질겨 계속 씹어 넘기다가 숨 넘어갈 뻔했다.
아버지가 전주 시장이던 양수도 같은 반으로 대신동에 집이 있었는데, 남부민동의 우리 동네 집들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전형적인 부잣집들이었다.
한편, 중학교 2학년이 된 몇 개월 후, 어려운 집안 형편을 어렴풋이 인지하던 나는 초등학교 친구 원삼이로부터 신문배달을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어느 날 완월동에 위치한 한국일보 신문 보급소를 찾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3학년초까지 약 1년간, 경남 도청 뒤 산복도로 상의 가정집들을 대상으로 신문배달을 하고, 오후에는 “확장” (한국일보를 신규 구독하게끔 영업을 하거나, 타 신문을 한국일보로 대체하는 영업 행위) 활동을 한 뒤 귀가를 하곤 했다. 가끔은 남은 신문을 사겠다는 어른들이 있어 나는 생각지도 않은 소소한 용돈을 벌기도 했고, 버스 요금 대신 신문을 주고 버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신문 배달을 마친 첫 달, 보급소 소장으로부터 첫 월급을 받았다.
당시로선 처음으로 만져 본 아주 큰돈이었다. 퇴근해서 집에 오신 아버지께 드렸다.
아버지는 네가 고생하며 벌어온 돈이니 네가 알아서 쓰라고 하시며 그 돈을 받지 않으셨고, 생각 끝에 나는 그 돈으로 한 번도 사 보지 않은 문제집들을 샀다.
처음 대하는 문제집이 신기하게도 느껴져, 틈이 날 때마다 문제집과 교과서를 끼고 공부하는 습관이 들었다.
이 즈음 아버지께서 우리 집 부엌 위에 다락방을 만들어 주셨는데, 내 다락방이 생기게 된 나는 신나서 새벽에 일찍 일어나 그곳에서 공부를 했다.
나지막한 다락방에는 조그만 백색 전구가 하나 있었는데 백색 전구가 달린 위치가 앉은뱅이책상에 앉은 내 머리와 거의 붙게 되어 조금만 앉아 있으면 전구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나는 찬 물에 수건을 적셔 이마에 짜 매고 공부를 하곤 했다.
엄마가 어머니라고 부르시던 우리 할머니 계원이시던 유민이 할머니는 중풍으로 한쪽 팔다리가 불편하셨는데, 새벽마다 국숫집 옥상에서 관심 어린 큰 눈으로 나의 다락방을 유심히 쳐다보시곤 했다.
나는 2학년 이후 처음 치른 모의고사에서 반 1등을 했고, 신문 배달을 계속하면서도 2학년을 마칠 때까지 계속해서 반 1등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던 나는, 시간을 맞출 수 없어 매일 아침 수업 전에 실시하던 보충수업에는 참석할 수 없었다.
신문 배달을 하던 중, 1학년때 같은 반 친구였던 진우를 그의 집 앞에서 만난 적도 있었는데, 학교 친구들에게는 비밀로 해 줄 것을 진우에게 부탁하기도 했는데, 다행히 진우가 약속을 지켜 주었다.
어느 날, 엄격한 얼굴이 상징인 키가 작은 김영일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네가 아침에 다른 곳에서 과외를 하고 오는 모양인데, 네가 반에서 1등을 하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각별히 내가 이해를 해 줄 테니, 단체로 진행하는 학내 보충 수업 대신 소수로 진행하는 학교 밖 과외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계속 유지해 주길 바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교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크게 야단맞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넓으신 선생님의 이해심에 감동을 했는지, 사정을 있는 그대로 말을 못 해서였는지, 어려운 집안의 여건 생각에 잠시 복잡한 감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었는데, 겨울방학 동안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실시한다고 했다.
나는 충범이의 제의와 경제적인 이유로, 보충수업을 신청하지 않고, 매일 학교 도서관에서 자습을 하기로 결정했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3학년에 되어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수학과목의 경우, 겨울방학 보충수업 기간에 이미 진도가 많이 나가 있었다. 이후 수학과목 진도를 따라 가느라 많이 힘이 든 기억이 난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 고교 진학을 앞둔 시점이 되니, 부모님은 상고에 진학해서 빨리 돈 벌어 집안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어느 날 중 3 담임선생님께서 부모님을 모시고 학교에 오라고 하신다.
영어 선생님이셨던 김명관 담임 선생님은 성적이 탁월한 아들이 상고가 아닌 인문계로 진학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된다고 어머니를 강하게 질책 겸 설득을 하신다.
이후 나는 설득하기 어려웠던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힘겨운 설득 덕분에 인문계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고, 훗날 대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