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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I Sep 11. 2024

나물

WILD GREENS - 단편집 미히버스(MIHIVERSE) 수록작

할머니집에 가면 항상 반찬이 나물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밥상에 나물이 올랐다.


"나물 안먹는다니까."


"왜 나물을 안먹는다고 해?"


"나물은 맛이 없단 말이야."


"나물은 꼭 먹어야 하는거여."


할머니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사실 이 나물을 가만히 두면 말이여, 산 나물이 된단다.


산 나물들은 커다란 나무가 될 때까지 모든 영양분을 흡수하기만 해. 


아직 다 자라지 않았을 때 사람이 먹어줘야 하는 거란다."


"치, 그런 말에 속을 나이가 아니야."


그 때였다. 앞에 놓인 양념에 절인 고들빼기가 기지개를 펴더니 이파리를 일으켰다.


"에구구, 이것 봐라. 산 나물이 되어버렸네."


나는 그걸 신기하게 쳐다봤다.


"알았어, 그럼 내가 먹으면 된다는거지?" 


나는 그 고들빼기를 들어 밥공기 안에 얹혀 두었다. 빠르게 밥알들로 그것을 덮어 위장하고,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빈 숟가락을 쭉쭉 빨았다. 가까운데가 잘 보이지 않는 할머니를 속인 것이다. "자, 봤지?"


그 후 나는 식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할머니가 설거지를 하러 주방에 가자, 나는 주말에 끝나면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그 고들빼기를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돌아왔다.


물티슈를 몇 장 집어다가 그 산 나물에 붙은 양념을 씻겨냈고, 흰 휴지에 돌돌 말아 책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방 안에 누워 빈둥빈둥하고 있는데, 책가방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책가방 속에서 고들빼기가 나오고 있었다. 


"어두운 데는 별로야." 


그가 말했다.


"너 말을 하는구나?" 내가 말했다.


"우리 고들빼기들은 나물 치고도 꽤 똑똑한 편이지." 그가 으스댔다.


그는 아까전보다 조금 커져있었다. 아마도 물티슈의 물을 흡수한 탓으로 보였다.


"앞으로는 무첨가 물티슈를 사용하도록 해. 화학방부제는 뒷맛이 깔끔하지 않거든."


그는 내 가방 주머니에서 텀블러를 꺼내 한쪽 이파리로 질질 끌고 방 가운데로 왔다.


"여기가 좋겠어." 


그는 텀블러 뚜껑을 돌려 따더니, 온천에 몸을 담그는 듯한 몸짓으로 그 안에 뿌리를 담그고 들어갔다. 


그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이파리를 쫙 폈다.


이제 그는 방 한가운데, 가장 양지바른 곳에서 광합성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음악을 좀 틀어주겠어? 리하르트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로."


나는 휴대폰으로 그가 말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이 음악이 처음 연주될 때, 나는 그 집 계단참에서 쉬며 몸을 녹이고 있었지."


그는 음악에 맞추어 우아하게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나는 자연의 아름다운 동작에 매료되었고, 나물이라는게 참 근사해보인다고 생각했다. "다음 식탁에 오르는건 한 번 먹어봐야겠어, 맛이 꽤 궁금한데."


자연의 목가적인 음악 소리 속에서 내 눈이 꾸벅꾸벅 감겼다.


어쩌면 그가 왕성하게 발하는 이산화탄소가 방 안에 가득 찬 탓일지도 몰랐다.


어느새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저녁이었다. 나는 방 안에서 어떤 인기척을 느꼈다. 


"으악, 괴물이다."


나는 방 한 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 울퉁불퉁한 어떤 몸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 것은 거대해진 고들빼기였다.


"아, 산 나물이었구나."


그 것의 정체를 알고 나는 다소 안심하였으나,


그의 몸체는 이제 우락부락하고 거대해져있었다. 이파리는 야자수잎처럼 거대하고 크게 벌어져있었으며, 


뿌리줄기는 책상을 통째로 삼켜버린 것처럼 딴딴하고 두꺼워져 있었다. 


그에게서는 흙 냄새가 났다.


"어느새에 이렇게 커버린 거야?"


내가 말했다.


그는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그에게 등이랄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어두워진 방 안을 살펴보았다.


어항 속의 물은 말라 있었고,


가방 안에 넣어두었던 초코바는 껍질이 뚫려 안에 텅 비어있었다.


나무로 된 방바닥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고,


벽지는 그의 거대한 뿌리와 이파리에 마구 긁혀있었다.


문득 나는 어항 안에서 기르던 물고기를 떠올렸다.


"물고기는 어디있지?"


산 나물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제서야 나는 그의 앞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뿌리에는 붉은 얼룩이 묻어있었다.


그의 뿌리와 줄기 사이가 서서히 벌어지면서,


그는 이전보다 더 낮고 두꺼워진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영양분이 여기 있네?"



작가의 말


'산나물'의 위력은 꽤나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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