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랫동안 살았던 만덕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곳은 구만덕과 신만덕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고 우리 집은 구만덕에 위치해있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우리 집을 항상 내려다보던 상학봉이 생각나고, 그때는 그 산을 넘어가면 뭔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다
만덕동의 이름은 공민왕 때 있었던 만덕사라는 절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만 명의 사람들이 피신한 곳이라는 설이 있다. 아무튼 만덕터널 근처에 만덕사지가 있고, 금정산에 있는 병풍사는 승병들이 왜군들과 맞서 싸운 흔적이 남아있다.
예전에 아버지는 초량이라는 곳에 사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군대생활을 할 때쯤 셋째, 즉 막내 삼촌 되는 분이 대학생 때 저수지에서 수영을 하다가 돌아가셨고,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우리 집안이 정착한 곳이 바로 구만덕이다.
구만덕은 6.25 때 피난민들이 내려와 정착한 곳이었고 내가 대학생이 훨씬 지났을 때에도 동네의 형태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는 다른 곳에서 살았던 적도 있었지만 토지측량 때문에 옆집과 분쟁이 생겨, 안방을 부숴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모님과 집을 합치기 위하여,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3층짜리 건물을 세웠다. 우리는 18평짜리 작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34평짜리 넓은 집으로 이사했고, 조부모님들은 1층에 살았다. 그 당시에는 우리 집이 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었고 6.25 때는 학도병들을 이끌고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지킨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받으신 전쟁 용사 출신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전쟁 중이거나 바다에 나가 계실 때. 아들 세명을 모두 대학에 보낸 억척스러운 여장부였다. 나는 장남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조부모님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막내 삼촌을 잃고 처음 안게 된 손자라 두 분에게는 아마도 내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6학년 때, 할아버지가 당뇨병으로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전쟁터나 바다에 있었을 때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신 분이었을 것이다. 그분은 평화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는 술과 도박에 찌들어있었고, 할머니는 집을 지키려고 집문서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말리려다 얻어맞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도 술ㆍ담배를 멀리하고 도박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가 여성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려 하는 것은 그때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라 내 본능과 관계된 것이다. 아마도 국가에서 유공자들을 우대하고 처우를 잘했으면 할아버지는 더 나은 삶을 살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사정권은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하지 않았고. 그러한 것들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문민정부에 이르러서야 행해졌다.
IMF 때,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아버지 회사인 대우그룹이 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집이 빚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땀으로 안경테가 벗겨질 정도로 아등바등 일하셨다.
나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 떳떳한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모습만 보여드리다 할머니가 치매로 떠나셨기 때문이다. 그런 병은 우리 할머니처럼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분이랑 상관없는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때 날마다 집을 청소하시고 내 방을 정리해주셨다.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지만 그것이 할머니가 내게 부어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표현이었다는 것을 떠나가시고 난 후에나 알게 되었다.
좋은 일은 간간히 일어나지만 나쁜 일은 한 번에 터진다. 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이번엔 엄마가 스트레스로 직장암에 걸리셨다. 다행히 여동생이 다니고 있던 병원에서 치료를 잘 끝내서 건강을 회복하셨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없었다. 너무나도 비참했고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악화되어 숱한 고생을 했었고 그냥 죽고 싶었다. 그때 상학봉이 생각났고, 죽기 전에 산 너머에 어떤 것이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올라갈 때는 산세가 높았지만, 뒤쪽은 완만한 곳이라 돌아내려 가기에 수월한 곳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별거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 동네는 재개발이 확정되게 되었고, 3대가 살았던 집은 LH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지금은 그곳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고 그 건물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집을 떠나 새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는 속이 다 시원했지만, 그 집과 연결 짓지 않으면 그 시절을 떠올리는 데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고향만큼 익숙해져 버린 타향살이에 지쳐갈 때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기억 속의 그 집이 가끔씩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