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할아버지, #가족, #6. 25, #밝은 밤

by 비루투스

쓰다 보면 자연스레 지나간 시간들을 현재와 비교하게 되고 대비되는 생각들이 충돌하거나 그때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국면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다 보면 당시에 했던 생각과 그에 대한 행동에 대 또 다른 감정과 해석이 가미되면서 새로운 인식에 도달하게 될 때가 있다. 물론 내가 과대 포장하거나 확대 해석하는 경향도 있을 수 있고, 그때 옳다고 생각한 것이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기억은 그것을 발굴하는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고. 그것을 주조하여 파생되는 것들은 어차피 그것을 받이들이고 해석하는 기록자의 평가와 해석들에 달려있을 수밖에 없다. 동일선상에서 우리는 신화와 역사를 그 예로써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고 기록하던 중, 연상되는 기억의 편린들이 조금씩 떠오르게 되었고,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도 하나씩 생각나게 되었다. 그러한 기억의 단면들이 점차적으로 연결되면서 파노라마 사진처럼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그 시간, 그 앞에 서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6.25 참전 용사로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지키셨고, 베트남 전에도 참전하신 역전의 용사이다. 할아버지는 해군 창설멤버이기도 하셨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5대양 6대주를 누비기도 하셨다. 할아버지는 이전에 살던 동네에서 알아주는 효자였고, 당시 벌이가 없었던 큰 할아버지의 살림까지 책임지기도 하셨던 집안의 큰 기둥이기도 했다. 당시의 할아버지를 기억하시던 지인 분에 따르면 주변에서 나의 할아버지만큼 대담하고 민첩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항상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한 집안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악착같이 일했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원양어선에 탈 선원을 모집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는데, 배를 타기 위해서는 국민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당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기지를 발휘하여 불에 타서 사라진 학교의 졸업장을 위조하여 배에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험심이 강했던 청년은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을 찾아 거센 물살을 헤치고 나아갔다.


짊어질 수도, 팽개쳐 버릴 수도 없는 짐에 의해 파괴될 수 있는 자가 있는가? -니체

그러다 전쟁이 발생했고, 할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했다. 할아버지는 전쟁에 관해서 나에게 단 한 번도 이야기하신 적 없었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은 할아버지가 무릎에 총알을 맞아서 미국까지 호송되어 수술을 받으셨다는 이야기 정도였고, 그 상황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단편적인 기억을 토대로 영상매체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태극기 휘날리며'란 영화를 보게 되었는 데, 어느 한 장면에서 울컥하는 기분과 함께 눈물이 흘렀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내 할아버지의 삶이 영화와 함께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한집안에 아들이 둘일 때, 한 명이 전쟁에 나가게 되면, 남은 이가 가족을 돌보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할아버지 성격에 전쟁 망설이지 않으셨을 것이고, 큰할아버지한테 가족을 맡기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북한군의 침략으로부터 내 고장과 가족들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낙동강 최후방어선을 지켰고, 옆에 동료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상황에서 이성을 잃고 야차처럼 처절하게우지 않았을까? 아마도 아버지는 어린 손자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살아계실 때, 술에 많이 의존하셨던 것을 생각해보면 외상 후 스트레스가 있으셨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총에 맞은 상처는 아물었겠지만 심리적인 상흔은 안고 살으셨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평화가 너무나도 만연해진 세상이 어쩌면 당신을 주눅 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할아버지는 깊고도 먼바다를 나갈 때면, 그곳에서 위로를 받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아들들을 때리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발소리만 들으면 자는 척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혼자서 지고 있는 부담을 그런 식으로밖에 풀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미국은 참전용사들에 대한 처우와 예우가 확실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았다. 국가유공자에 대한 연금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생긴 제도이고. 당시 못 받았던 수당을 나중에 그때 시가로 쳐서 200만 원 정도 받았을 뿐이다. 나라를 위해 싸운 대가가 겨우 그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는 의인이었고, 국가에서는 영웅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는 그렇지 않으셨다. 지금도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면 그리 표정이 밝지 않으시다. 가족이라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을 부대끼면서 살았던 사람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과정일 수도 있다. 전쟁의 상흔은 가와 민족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도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할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들은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마귀 가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닮지 말라고 까마귀에 빗대서 나에게 이야기하신 것일까? 우리 부모님도 내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을까 봐,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도덕기준을 내게 제시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 한다고 해서 까마귀 새끼가 백로가 될 수 없었다.


까마귀는 특유의 검은 빛깔 때문에 불길한 취급을 받아왔지만 한편으로는 태양 까마귀를 비추면 흑점처럼 보인다고 해서 고구려에서는 '삼족오'라 하여 신령한 동물로 대우했다. 그러니 나는 처음부터 어설픈 백로 흉내를 낼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다. 히려 나는 내 기질과 특성들을 스스로 깨달았어야 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절염에 걸려 걷지도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걷다가 털썩 주저앉으면서도 끝끝내 회사를 갔다. 나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잘하든 못하든, 어떻게든 언젠가는 드시 해내고 만다. 그건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학습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손 씨 집안 자체에 흐르는 기질이다.

과거,현재, 미래가 함께 협력할 때 비로소,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고, 나는 할아버지의 강인한 정신과 육체를 토대로 하여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것이다. 검정이 블랙홀처럼 모든 색을 흡수하기 때문에 그 색이 검은 것처럼,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가졌던 어두웠던 기억과 그로 인한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모두 다 긍정한다.


이제는 나 또한 한 마리의 까마귀로서, 불타는 두 날개를 펴고 저 높은 태양의 나라를 향하여 하늘 높이 날아갈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삼족오는 봉황과 같은 이미지로 해석된다.

*이 사진의 저작권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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