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태엽 감는 새 연대기, #수제버거, #하루키, #미술관

by 비루투스

유튜브를 틀었는데 , 자기 수제 햄버거 집 먹방이 나왔다. 나는 먹방을 평소에 보지도 않는데 왜 런 알고리즘이 연결되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사람들은 유튜브 알고리즘이 자신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막던져서 어쩌다 관심을 보이게 되면 치고 들어와서 알고리즘화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선택을 하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어쨌든 화면 속에 나오는 패티는 크고 두꺼워보였고, 육즙이 줄줄 흘러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 어, 그러면 알고리즘의 낚시질에 낚인 건가?) 언젠 시간이 나면 그 가게에 방문해서 맛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곳은 영종도에서 출발하면, 도착하는 데까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고작 햄버거 하나 먹자고 그곳까지 가기에는 뭔가 명분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 갈만한 핫플레이스가 있는지 검색하다가 북서울미술관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조각 충동'이라는 전시회가 15일까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1시와 3시에 도슨트가 있었다.


오후 세시에 독서모임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나갈 준비를 해야 했고 나가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은 새 연대기'라는 책을 챙겨나갔다. 이 책은 3분의 2쯤 읽다가 말았는데. 도서관에서 민음사 판본이 나온 것을 발견하고 누가 볼세라 바로 챙겼다. 하루키 소설은 화려한 묘사보다는 매우 사실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아주 깔끔하게 읽히고, 이야기가 전개되는 상황은 억지스러울 정도로 작위적이다. 자유의지란 양념에 불과하고, 전반적으로 결정론이 강하다. 작가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등장인물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법도 지만, 그것은 하루키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적을 꿈꾼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고대 그리스에서 갑자기 신이 나타나 위급하고 복잡한 사건을 해결해주는 것


나는 아직도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인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잔상을 찾으며,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그러다 보면 선택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지만, 래도 나는 애잔하게 느껴지는 휴머니즘을 음미하는 것이 좋아서, 그런 표현이 나올 때마다 노트에 적고 또 반복해서 읽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남자 주인공이 결혼을 앞둔 직장동료를 위로하는 장면이다. 사친으로 지내는 직장동료가 내키지 않는 결혼을 앞두고 일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그녀를 위로하고 밤늦게까지 같이 있어준다. 여성은 마지막 인사로 서로 섹스를 할 것을 제안하지만. 주인공은 그 성욕보다는 연민을 택하고 그녀를 가만히 안아준다. 그는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잠이 들 때까지 '충전'해준다.


나는 그녀와 자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2시 정도까지 그녀를 '충전'하게 되었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고 가지 마, 부탁이야, 내가 잠들 때까지 여기서 나를 꼭 안아줘 하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그녀를 침대로 데려가, 거기 눕혔다. 하지만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를 꼭 껴안고 '충전'을 계속했다. 내 품 안에서 그녀의 볼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 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방도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녀와 자버리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 가능성을 머리에서 떨어냈다. 나의 본능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무라카미 하루키 >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낄 때, 우리는 상대에게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 상대의 고통이 나 자신의 고통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가 그녀를 안아주는 행동은 성욕이 아닌 공감 바탕으로 한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가장 옳다고 생각한 것을 선택한 것이다.


미술관까지 가려면 공덕역에서 갈아타야 하는데, 책을 읽다가 한 정거장을 지나버렸다. 그래서 되돌아가야 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책을 읽다가 또 지나쳐 예정시간보다 10분이 늦어버렸다. 미술관에 도착하니 도슨트가 이미 설명을 시작하고 있었다.


입구 쪽에는 로댕의 '지옥의 문'을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작품의 중간 부분 텅 비어 있었.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전시회의 취지는, 기술의 발달로 조각의 소재는 다양해졌지만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들은 진보하기보다 진부해고 있는 현실에서, 작가들이 조각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스스로 고민한 흔적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참여형 작품들이 많았다.


예술의 대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혔을 때, 작가가 느끼게 되는 심정은 마치 지옥의 문 앞에 선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혼자서 공백을 메꾸는 것보다, 그 공간을 열어놓고, 관객을 초청하여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해보자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댕의 '지옥의 문'을 오마주했지만. 작가는 닫힌 문을 열어젖혔다.

다음 섹터에 들어가 첨단소재를 사용하여 용을 형상화한 작품이 보였는데, 도슨트는 그것은 용이 아니라 이무기라고 말했다. 이무기가 수행을 거치면 여의주를 얻고 용이 될 수 있지만, 용이 되기 위해선 여의주를 하나만 가져야 하는데, 욕심을 버리지 못한 이무기는 여의주를 더 모으려다 용이 아니라 그냥 더 강한 이무기가 될 뿐이라고 한다. 요즘에 미술가들이 처해있는 딜레마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선택의 폭이 넓은 것도 때론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동시에 욕심이 잉태하면 사망을 낳는다는 성경말씀이 연상되었다.


욕심이 많아질수록 사람을 무겁게 옭아맨다. 그러나 욕심이 너무 없으면 무중력 상태에서 어디로 날아갈지도 모른다. 따라서 욕심도 술도 한쪽에 너무 치우쳐서는 안 된다.


욕심을 버려야 더 높은 상태로 도약할 수 있다.

미술관을 다 둘러보고 버스 올라탄 후, 그 가게에 대한 블로그들을 검색하면서 맛있는 햄버거를 먹는 행복한 상상에 잠겨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가게에 들어가니, 식사시간이 지나서인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일단 여기까지 온 김에, 제일 맛있어 보이는 더블패티 버거를 선택하고 기다렸다. 식을 받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크기보다 작았고, 굳이 그렇게까지 찾아가서 먹을 정도까지는 아닌, 그냥 평범한 수제 햄버거 맛이었다. 러나 배가 무척 고팠기 때문에 '순삭'해버렸다.


알고리즘에 낚였지만 맛이 나쁘지는 않았다. 단지 평범했을 뿐이다.

나는 서평형이 아닌 에세이를 적을 때, 생각의 흐름대로 글을 기술한다. 그러면서 하루키처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억지로 연결시키면서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알고리즘이 나를 낚은 것처럼. 나도 독자들을 낚고 있다.)


지하철과 미술관과 햄버거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범한 사물들이다. 그러나 내가 그곳으로 가겠다고 선택을 하면, 그 사물들은 나에게 사유를 이끌어주는 매개체로 변하고, 그곳을 거치고 나면 사물들은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게 소와 사물에 의미가 부여될 때 각 사물들은 생명을 얻게 되는데, 이것 또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즉 기적이다.


비록 작위적 일지 모르나, 나는 이런 식으로 기적을 날마다 체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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