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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Nov 24. 202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차라투스트라#초인,#아모르파티

*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읽어왔던 책 중에서 가장 익숙하면서도 정리하기 애매한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단언컨대 '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잠언적인 형식을 차용고 있으므로 하나의 단어일지라도  상징로는 다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 읽는 사람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 때문이다.


역사의 변곡점 니체의 평가


 종교와 교육을 막론하고, 많은 이상주의자들은 이전의 것들이 무너지면 그 토대 위에 계몽적인 것들이 얹히면서 사회는 발전적인 양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시간과 역사를 직선적이며 발전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혁신과 노력으로 과거의 모순된 것들을 개선을 통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하지만, 역사의 발전과정에는 만 있는 것 아니다. 그것과 함께 행이 발생할  수도 있고,  관만 달리할 뿐,  비슷한 패턴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허다하다.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라는 것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기적이라는 것 존재하며, 때로는 진보를  가로막는다고 지적되 본능과 이기심 같은 것들이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역사에는 일정한 틀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인 측면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힘의 의지들이 서로 부딪치 약동하고 있도 하. 그렇기 때문에  에너지의 파동들 한 변곡점에서 발현되고 수렴될지는 구도 알 수 없, 단지 그 흐름만 보고 대략적인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고정되는 실체가 존재 있다고 치더라도 른 것과의 대비 속에서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 없이 니체의 책을 읽는 사람들 그의 혁신적인 사상과 파격적인 문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기만의 잣대로 못  읽는 우가 은데, 그들 무신론자, 성차별주의자, 정신병자, 파시스트, 국수주의자 등의 범주로 국한려 한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그의 저서 군데군데에 나타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신의 주장 드러내려고 일부러 그러한 표현을 사용하기,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는  세간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점도 그러한 비난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을 읽고 이해할 수준이 되는 사람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 그래 놓고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는 자화자찬을 노골적으로 늘어놓고 있기도 하다.


 니체 독립투사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는데, 이육사의 '광야'에 등장하는 초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민족'이라는 이상향은 죽음과 공포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 분투했던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기도 했다.


니체에 대한


 박홍규는 '니체는 틀렸다.'라는 저서에서 독재정권의 연관성을 들먹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비판 늘어놓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인 맥락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잘못 읽는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수 있다. 그의 주장이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유는 일단, 자료의 출처가 분명하지 않고, 체의 포리즘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틀렸다.'수사만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선악의 저편'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너무 자극적인 수사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런 비난을 들을만하다고 생각되기는 한다. 그러한 비판을 의식는지는 몰라도  그 이후에 나온 '도덕의 계보'라는 책은 그나마 정제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런데 사실, 종잡을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니체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죽기 전에는 정신착란 때문에 그런  부분이 더 두드러지기도 했다.


 니체는 독일인이기도 했지만,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고, 심지어 독일을 비난하고 프랑스를 이상향으로 제시한 적도 있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여성 비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옹호한 적도  있다.  니체의 사상은 상대이고 개방특징 때문에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고 그의 강경한 어조는 듣는 사람의 입장을 다소 불편하게 만들 수도 으며 독일인, 남자, 지식인의 처지에서 글을 쓰다 보니 편향인상을 줄 수도 있다.  래서 맥락에  따라 주체와 객체 위치가 입장에 따 바뀔 수도  있,  시대적 상황과 문맥을 고려하면  오히려  그런 입장 때문에  니체의 논리에 설득력이 실린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그 어떤 철학보다  호소력이 짙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사상이라도 주관성이 담기지 않는 는 없다는 점 해서 구조를 분석하는 것 필요하다. 예를 들면 여성이 주체가 되면 남성이, 소수자가  주체가 되면 다수자가. 이방인이 주체가 되면 민족이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요즘엔 페미니즘  진영에서  니체를 비난만 하기보다는 러한 분  통해  그의 철학을 조명하려는 발전적인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생각된다.


젊은 여자한테 간다고? 그럼  채찍을 잊지 말라!


 주체가 정당성을 얻게 될지라도 스스로 거듭나지 않으면, 언제라도 객체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는 것처럼 진리의 속성 또한 그러한 측면이 있다. 진리는 독일어에서 여성명사이므로 니체는 진리를 여성에 빗대어 표현하였는데, 채찍이라는 단어의 사용 때문에 여성을 비하하는  뉘앙스로 받아들여질 수 도 있지만, 그 진리가 형식적인 것에 머물지 않으려면 작은 것에서부터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표현하고자 그러한 비유를 든 것이다. 라서 깨달음의 정점에 이른 라투스트라에게도 스스로 경멸하고 몰락해야 하는 과정들이 필요게 되는 것이다. 첨언을 하자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타율적으로 강제당하는 것이 필요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의도로 행해지는 것이라도 그러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 개인에게는 폭력과 같은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즉,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권 관련 세미나에 참석할 때마다, 고전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억지논리를 다 붙이면서, 작품을 비난하는 강사들을 만나게 되는데, 얻어들은 얕은 지식을 근거로 학생과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와 인권을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는 것은 어쩔 수없다.  그들 보면 '모두를  위한 책, 그러나  누구 위한 것이 아 책'이라는 문장의 뉘앙스가 너무나도 확연하게 와닿는다.  의 사전적 의미는 '옳고 그름을 가려 잘못을 따진다.'라는 의미인데 만약, 비판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면 먼저 책을 제대로 소화하고 충분히 사유한 후에 하는 것이 순리에 맞다. 렇지 않았다면 때로는 침묵하는 것이 자신의 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대체 당신들은 핑계를 대고 트집 잡는 것 외에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소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근거 없는 잣대로 비하하지 말아 달라! 당신들의 수준이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비판하려면 사실을 제대로 적시하고 정당한 비판을 해달라! 그래야 서로가 견제하고 상생하는 발전적 미래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대들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비밀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들이 파헤쳐지고 부서져서 햇빛에 드러날 때, 그대들의 거짓도 그대들의 진실로부터 떨어져 나가리라!


  니체에게는 진리조차도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장이나 단어를 두고 확정 지을 것이 아니라, 문맥과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어야 한다. 즉, 니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데아처럼 이상적인 가들의 체라기보다, 그것에서 파생되는 모든  붕괴면서 폭발과 함께 생하게 되는 모든 가능의 발현이다. 그는 이러한 추동력을 '힘에의 의지'라고 불렀고,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연금술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사유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의 깊은 곳으로부터 자신을 들여다보고 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 열과 압력을 통해 불순물까지도 녹여 순수한 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연단을 통해  추출되는 결정들을 하나씩 꿰어나가게 될 때, 우리는 의 경이로움을 온몸 가득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선악의 귀추나 성공의 실, 우주의 광대한 역사에 비하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 자신의 가능성을 너무 낮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에  짓눌리며 살아다. 그런데도 궁지에 몰렸던 개인이 상을 직시하고 그것을 용의 대상으로받아들일 때, 더 이상 삶은 인간을 위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러한 의지는 쇼펜하우어가 강조한 부정적인  의미가 아, 어떤 결과가 나올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태도 말한다.


  체는 세파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자신을 관조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고귀한 자 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민족까지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민족이라는 개념 때문에 니체의 이론이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 또한  대표적인 오독의  사례이다. 강조하는 민족은 자신을 극복한 개인들이 만들어가는 이상향이라고 해석해야지 국가의 범주까지 확장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국가라는 집단은 성격상 민족의 특성을 약화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 하기 때문이다.  리고 제국주의는 종국에 계급과 사회를 고착화하는 특성이 있어서 에의  의지는 결국, 멈춰 서게 된다. 달이 차면 곧 기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이상적으로 그렸던 사회는 끊임없이 경쟁하고 발전하는 그리스 민족이었다. 하지만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정복했을 때 제국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고, 의 장점들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알렉산더의 통일 이후,  페르시아 문화가 그리스에 침투하면서 그는 신이 되었고,  사후에 제국붕괴기 시작했다.  


  사람니체 철학의 핵심이 초인 사상이라고 고 있데, 사실 초인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초석으로 보는 것이 문맥에 더 부합한다. 따라서 초인이 신처럼 떠받들어지는 것은 니체가 원하는 바가 아니 초인조차도 독일인들이 극복하기를 원했다. 단지, 사람들이 신이 없어진 사회를 감당하지 못하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마키아벨리가 탁월한 능력을 갖춘 군주가  무너진 공화국을 재건하기를  원했던처럼, 니체도 위대한 초인이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줄 것을 바랐다고 보는 것이 더욱더  합리적인 해석이다.

 니체의 사상이 다윈의 진화론에서 파생된 것을 고려하면, 그  과정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연의 입장에서는 시스템이 가장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 선이고 그렇지 않은 것이 악에 가기 때문이다. 래서 피상적인 해석으로 니체를 국한 버리거나, 다른 언어로 희석려고 하는 시도들은  무익  것에 불과. 그들은 동의어나 다의적인 표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거나, 자신들의 이익을 다지기 위해  그 뜻을 왜곡하는  무리 지나지 않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정신  속에는 온갖 시대들이 서로 어긋나는 말로 떠들어 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꿈과  떠들어댐이 그래도 그대들의 깨어있는 상태보다는 더 현실적이었다.

'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가 자신의 철학 정수를 담은 책이라고 말하기도 했었고, 그의 삶과 고뇌를 고려하는 것 없이 , 앞서 말한 내용들이 전제되지 않으면 굉장히  위험한 내용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히틀러와 스탈린이  민족의 개념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기  위한 통치 도구로 사용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할 수 는데,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들은 군장에 이 책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한쪽은 민주주의이고 다른  쪽은 공산주의라는 제라는 점에서 지금도 시사하는 의미가 다고 볼 수 있다.


니체와 라투스트라


 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 교의 창시자로서 선과 악의 대립이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불을 숭배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종교의 교리를 확립하고, 철학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니체책에  등장하는 라투스트라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틀을  해체해 버린다. 는 진리를 구현하기  위해 기존의 관념과 자신이 직접 구축한 개념까지도 불에 살라버고, 스스로 몰락을 자처하는, 존재 자체가 역설이고 모순인 인간이다.


 차투스라는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섭리가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간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힘 지위 대신하며, 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 영원히 회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은 세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인 행보로 역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언젠가 때가 면 진정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라투스트라가 보기에는 들은 그저 제분기처럼, 맷돌처럼 같은 행위만 반복하며 일하고 있을 뿐이다.


 계몽과 진보라는 가치도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들의 의미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다가오게 될 시간의 종착점이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때가 오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에 대해  증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자신들의 운명을 알면서도 하늘을 들먹이면서 그것을 회피하려는 헛된 노력 하게 되는데, 심지어 진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 한다. 하지만 라투스트라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므로 시간의 경과는 그에게 전혀 위협이 될 수없다. 오히려 그것은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순간과 영원의 경계를 어느 순간부터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그에게는 대지에 뿌리를 두지 않는 종교와 학문은 모두 거짓에 불과하 자신의 두발을 통해 지혜를 추구하고,  높은 곳에서 긍지를 느낀다.


 일찍이 높은 산에서 물고기를  잡은 인간이 있던가? 그리고 여기 산 위에서 내가 바라고 하는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라 할지라도 내가 저 아래에서 엄숙하게 기다리느라 안색이 창백하고 노래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낫다.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삶의 무게들은 오히려  그들을 력의 영에 짓눌리게 만들,  자신들을 타인의 지배와 복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다. ,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리가 아니라 무게를 버텨낼 수 있는 신체와 건강이다.  그보다 더 나은 삶의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지식과 기술을 익혀야만 하는데 대개는 경쟁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거나, 그 위치에서 도태되는 것 두려워만 하다가 때가 다가오면,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

 남의 짐을 지기만 하던 낙타는 반복만 되 삶에 의심하게 품게  때, 사자로 변신하게 되는데, 강요되던 모든 가치에 대해 항하고,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들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사자의 한계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데 있.  바로, 혁명의  발현 단계가 그러하다. 그런데, 대개는 그 의도와는 달리 미완의 상태로 끝나는 경우가 보통이다.

 사람들은 타도해야  대상이 사라져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면. 다음 단계에서 무엇을 해야  르는 경우가 널리 퍼졌.  그렇게  미적대다 보면  그들도 저들처럼 타락하거나  이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결국 타도의 대상으로 될 뿐이다.  들은 혁명의 기분에 취해있을 뿐, 여전히 삶의 무게는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짐들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습성고쳐지고 있지 않은,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해도 다를 바가 없으며 또한  그러한 측면 인정하려 하지 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이념에 오해의 소지가 생겨나기도 한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현상을 '인지부조화'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혁명그 자체로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생겨났던  고뇌와 딜레마, 그로 인한 숱한 시도들이  끝없이 계속되어야 다. 그런데  사람들은  혁명이 겪어왔던 여정을 도외시하고, 선이라고 부르 과실을 취하려 면서도, 정작 그 길에 들어서게 될 때는 감당해야 할 과 의무를 회피하고 권리만을 주장하고 있다.  권리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자들은  다시 낙타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러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상대 거꾸러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스스로  가치를 만들지 못하면서 시기와 질투만   그러한 인간군상들을  니체는 ' last  man' 즉,  종말의 인간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항상 깨달은 자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왔지만,  라투스트라게는  모든 것들은  영원회귀에 수반되는 것에 불과하다. 다만  그는 그러한 소란들에서 벗어 조용한 곳에서 리를 묵상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평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조용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것 같다.


아모르파티


 우리를 바닥으로 내리려는 참을 수 없는 들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그러한 짐들을 던져버리고  자신을 존재로  인식하고 스스로 가볍게 춤을 출수 있어야 한다.  니체는 그러한  단계에 머물 수 있는 인간을 아이와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이는  순간 만족되지  않는다면 영원을 잃어버린 듯이 슬퍼하, 가장  이기적인 만큼  자신의 욕구에 충실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이처럼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  것은 하나의 표상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 다양성을 내포하영혼보다 더 큰  범주의 이성이도 하.


춤추는 자의 귀는 그의 발가락에 달린 것이다.


 이제 아이로 거듭난 인간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될  운명의 부메랑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놀이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확률 정해지는 숫자놀음 같은 것 아니라, 무한하게 확장되는 가능성의 향연이

될 것이다.  렇게 될 때, 지나간 것은 지나는 대로 그런 의미가 어가고. 결과 주 우리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잣대는 더 이상 구속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삶에 신성한 명분을 부여기 위해 자롭게 살면 되는 것이다.

 저 은밀한 자정이 위대한 정오가 되는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이 붕괴되면서  선과 악라는  범주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세계에는 갈등과 합이 계속되게 되고,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 또다시 역사는 시작다.  

 혼돈, 그  우주는 에너지를 발산시켜 별을 생성케 하고,  인간은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채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것들을 운명이라고 부르, 온전히 받아들이 사랑할 수 있게 될 때,  삶은  역동적인 것으로 변하게 는데, 그때 우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흥겹게 춤을 추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아직도 가능한가! 그러므로 그대 자신을 초월하여 웃는 법을 배워라! 그대들의 가슴을 들어 올려라. 그대 춤을 잘 추는 자들이여, 높이 더 높이!  그리고 잘 웃는 것도  잊지 말아라!


참고도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리히 니체, 부북스, 2012.11.0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 정동호, 책세상, 2021.09.15>

<니체는 틀렸다,  박홍규, 푸른 들녘, 2022.10.27>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나답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수상록,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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