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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

by 비루투스

*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불가결한 조건이다.1)



‘사랑의 기술’이란 이름을 가진 두 권의 책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오비디우스’의 책으로 2000년간 작업의 정석이란 별명을 가졌고, 또 다른 책은 ‘에리히 프롬’이 쓴 것으로, 현대사회에서 변질되어가고 있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사랑의 기술은 ‘방탄소년단’이 추천한 세 개의 책 중의 하나이기도 하며, 나머지 두 권인 ‘데미안’과 ‘영혼의 지도’는 주제와 연관되는 부분을 발췌하여 본문에서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이름은 같지만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책은 하나의 개념을 두고,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먼저 오비디우스의 책에는 프로이트의 이론이 적용가능하며, 사랑의 본능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사랑은 이드의 성적 욕망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본능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저장고로써 쾌락을 추구할 뿐이며 여기서는 도덕도 선악도 없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이드가 억압을 당할 때 신경증의 원인이 되고 결국, 사랑은 상호 간의 본능적 욕구와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오비디우스는 결혼은 제도적인 것에 불과하며, 성욕의 해소가 행복의 원천이라고까지 주장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급기야 황제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은 얇은 두께를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랑의 개념을 다양한 관점에서 비교분석하고, 정신분석적인 측면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는 ‘에로스’는 사랑의 한 측면만을 확대 해석한 것에 불과하고, 그 반대선상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플라토닉’이라고 불리는 개념도 마찬가지일뿐이다.

사실, 플라톤도 '향연'에서 사랑을 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으로 뚜렷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었, 육체적으로는 생식을 통해 그리고 인간을 창조적으로 이끌어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랑과 활동성


사람들은 불안하고 원칙이나 신념이 없으며, 그들에겐 전진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목표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남아있으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도우러 오길 희망한다.2)


프로이트는 모성을 표상하는 상징물로써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스핑크스를 차용했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와 짐승의 몸통을 하고 있는데, 그는 그러한 특징을 ‘모성애’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모성애는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지만, 지나치게 편향성을 띄게 되는 경우 자식을 그르친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한 집착은 존재로써 아이를 품지 못하게 하고, 아이를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대상화시킨다. 결국, 아이는 모성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성숙된 사고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독점하고자 하는 소유욕에 집착하여, 아버지의 위치에 서게 되는 사람을 원망하게 되는데,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퇴행성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현상을 남성의 위치에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여성은 '일렉트라' 콤플렉스'라고 분류한다


프롬은 부정적인 모성애의 특성을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의 관계까지 확대하여 다루고 있는데, 그 원인을 '자기애'의 결여가 집착으로 변질된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사랑에는 정체되고 획일화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동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속성도 함께 가지고 있는데, 프롬은 이러한 ‘활동’을 외부의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찰과 관조 등과 같은 내면적 활동을 통해 생산적인 힘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말했고, 그것에는 이기주의와 자기애를 구분하는 지표가 되는 것으로 '자발성'이 내포되어 있다.


알랭 바디우는 활동의 개념을 외연적인 '만남'에까지 확대하였는데, 그렇다면 만남 자체가 두 사람에게 필연의 연속적인 계기가 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행동들까지 운명적인 것으로 전환되게 된다. 이러한 사랑에는 '활동성'이 수반된다는 측면에서 과정이나 노력 없이 주어지는 '행운'과 뚜렷이 구별되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만남 그 자체가 행운처럼 여겨질 것이다.



자유와 가능성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는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3)


현대사회는 구성원들이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바라고 상품이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이란 명분으로 표준화된 인간상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자유주의적 개념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하므로, 감정적 불안정성과 소유욕과 집착을 동반할 수 있는, 사랑은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욕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결혼정보회사나 데이팅앱이 활성화면서, 조건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영역까지 수치화가 가능해졌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데이터를 통해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도 활동성이 지속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요구되는 조건과 기댓값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에 주어지는 것은 지속가능한 행복이 아니라 낯선 변화에 맞닥뜨리는 가능성이고 그것은 관계와 관계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사랑 또한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기반하고 있다.

리스크가 관리되면 될수록 효율성이 증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슴 벅차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지게 될 때 사랑은 점차 활동성은 잃어 가고, 한 몸이라 생각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게 될 것이다. 사랑에는 선험적인 속성이 있고, 대상에게는 그 감정을 현실화시킨 것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학습과 예측이 가능하지만 서로에게서 계속되지 못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상대방에게 의미 없는 구속처럼 여겨질 것이다.


프롬이 내리는 정의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대상을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태도로 대하고, 그 대상을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게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 프롬은 이러한 사랑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 시작되고, 대상에 대해 욕망을 표출하거나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배워가며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성과 여성은 대조적인 극으로써의 고유성을 잃어가고 극단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발언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하지만 양자가 자신의 특성과 차이의 간극에서 나오는 장점들을 잃어가고 사물화, 대상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보다 평등해지고 있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사랑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지식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에서 어느 정도 단서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제 자신에게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보자.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인식은 나의 평가와 얼마나 일치하는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4)


각 사람은 자신의 몸에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남자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비율이 높고, 여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수치가 높다. 이러한 점은 남녀의 물리적 실체로서의 차이이며,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되는데, 구스타프 칼 융은 남성의 여성적 자아를 ‘아니마’, 여성의 남성적 자아를 ‘아니무스’라고 명명했다.

일반적으로 남성성의 특징은 이성적이며, 목표지향 적이고, 추상적이며, 수직적 질서를 중시한다. 반면 여성성은 감성적이며, 현실지향적이고, 구체적이며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며, 정신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서 자외선 끝에는 ‘원형’이 자리하고 적외선 끝에는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만, 각각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기 갖추고 있다. 그것은 호르몬 또는 자아의 비율의 차이이며, 그 정도에 따라 성격과 성향이 갖춰지기도 한다. 그러나 갖춰진다고 하여 그대로 고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출발점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써 해석하는 것이 더 본질에 부합하지만, 현대사회는 이러한 특질을 무시하고 있고 효율적인 측면에서 같은 수준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산업자본주의의 폐해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기득권이 아니고 여성적이라는 것이 열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간극이 주는 차이를 인식하고 학습하며, 함께 발전해 나갈 때 주어진 것 이상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평등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없애 중성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을 남성성으로,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여성성으로 대치시켰다. 그러한 대극적 요소를 가진 요인들이 하나의 개체에서 충돌할 때(외부적으로는 전쟁이고 내부적으로는 내적 투쟁을 말한다.) 새는 드디어 껍질을 깨고 스스로 날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조건과 단계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원칙에 따르고, 성숙한 사랑은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원칙에 따른다.5)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신분적 요소보다 경제적 요소가 중요해졌고 사람들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서 낭만적 사랑을 예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적 요소는 경제적 요소와 다를 것이 없었고, 낭만은 구매력이 있을 때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들이 사랑의 전제조건이라면 ‘적자생존’의 원리 속에서 살아남는 사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알랭 바디우는 현대인들은 위험의 부재라는 범주 안에서 사랑을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랑에서 모든 중요성들이 박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상실의 위험이라는 요소가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의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과 갈등 같은 위험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주고 더 많은 힘을 얻게 할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먼저 심미적 단계에서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에 빠져 그것을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윤리적 단계에서는 사랑은 진정한 것으로 변하며 자기 고유의 진지함을 실현하게 되고, 이는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단계에서는 사랑에 대한 맹세의 절대적인 가치가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승인받는 경우를 말한다.

사랑에 대한 선언은 서로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부여하는데 이는 영원한 사랑을 보장하는 행위가 아니며,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을 사랑이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랑이 둘만의 선언이고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순간마다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사랑에는 항상 재연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 사랑을 창출하는 행위는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써 그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즉 자발적으로 선택한 그 목적을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로써 ‘계속성’을 가지게 되고 그것은 더 나아가 결단이 되고 약속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이 신성해지기 위해서는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영원히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이 사랑을 위해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당신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계속적으로 삶으로부터 이러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이며,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 반복되는 질문들의 방향을 조금씩 찾아가게 될 것이다.



사랑에 관한 지식 그리고 실현


우리는 모두 하나지만 우리는 각기 독특하고 복제할 수 없는 실재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6)


사랑이 지식이라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다. ‘존재냐? 소유냐?’에서 프롬은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즉 사람이 주체가 되는 내적 행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주체성이 기반이 된 사랑은 상대방을 동일한 개체로서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을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로써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자신의 세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 드는 점에서 구별되며,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세계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따라서 사랑은 원칙적으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게로 향할 수 있는 준비로서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배타성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사랑이란 이성과의 사랑을 넘어 동질감 속에서 서로가 각기 독특하고 존중받을만한 개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보다 약한 이를 동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약하고 위태로운 자신을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사람들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안타까움과 비애를 느낄 때 영혼이 정화되는 체험으로서 ‘카타르시스’적인 동조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만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되는 차이점이 있고, 형제애와 모성애는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애와 구분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사랑은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신’과 결합된 사랑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존경과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의 당연한 결과라고 ‘사보아 보좌 신부’는 고백했다. 결국 자기애는 사랑의 시작단계이자 최종단계로서 사랑의 대상들과 나를 하나로 결합하게 만들게 되며. 따라서 사랑은 주체성을 바탕으로 할 때 각자의 차이를 전제하며, 그러한 차이는 서로에 대한 존중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사랑의 역설적인 만남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그렇게 구축된 세계의 질서를 통해 관계를 설정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의미를 찾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재정의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7)


플라톤은 사랑의 도약 속에는 보편의 씨앗이 있다고 말했다. 알랭 바디우는 이 말을, 사랑은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라고 해석한다. ‘이데아’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이상적인 가치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성하는 형식과 실체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표상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사랑의 이데아’란 만남과 그 순간의 모든 감정과 기억 그리고 의미와 판단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랑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행위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삶의 깊은 의미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마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맹세 앞에 서로를 구속되도록 만들어버린다. 사랑은 하는 것으로써 능동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받는 것으로써 수동적이기도 하며, 이러한 역설적인 대립과 조화 속에서 또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생성하게 되고, 막스 뮐러는 '독일인의 사랑'을 통해 대상의 상실까지도 사랑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사랑, 그것은 자기애를 넘어 성애와 모성애 그리고 형제애 더 나아가 신과의 합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한 사랑에는 생산적인 특성이 있고,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이지 않는 존재에까지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주어진 어려움을 참고 견디게 될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눈물 끝에 맺게 되는 결실들이 그 기억들을 기념으로 되돌려 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러한 것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재발명되어야 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서문

사랑은 실천이다: 감각과 사고를 통한 존재의 확인

‘사랑의 기술’ 두 권의 책: 오비디우스 vs 에리히 프롬


Ⅰ. 사랑의 본능과 사회적 억압

오비디우스의 사랑: 성욕과 쾌락 중심

프로이트의 이드와 리비도

결혼 제도에 대한 비판과 유배의 역사


Ⅱ. 사랑의 기술과 심리적 성숙

프롬의 사랑 개념: 기술로서의 사랑

에로스와 플라토닉의 경계 해체

플라톤의 ‘향연’과 사랑의 이중성


Ⅲ. 사랑과 활동성

모성애의 양면성: 보호 vs 집착

오이디푸스/일렉트라 콤플렉스

프롬의 자기애 결여와 집착

바디우의 ‘만남’과 사랑의 활동성


Ⅳ. 자유와 가능성

현대 사회의 규격화된 인간상

사랑과 자유주의의 충돌

기술과 조건화된 관계의 문제점

사랑은 불확실성과 가능성의 영역


Ⅴ. 남성과 여성의 차이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개념

남성성과 여성성의 스펙트럼

산업자본주의와 성평등의 왜곡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자아의 탄생


Ⅵ. 사랑의 조건과 단계

키에르케고르의 사랑의 3단계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바디우의 사랑의 재연과 갱신

사랑은 의미 창출의 행위


Ⅶ. 사랑의 지식과 실현

프롬의 ‘존재냐, 소유냐’

형제애와 보편적 사랑

성애 vs 모성애 vs 형제애

신과의 합일로 확장되는 사랑


Ⅷ. 사랑의 재정의

바디우의 사랑의 이데아

사랑은 경험을 통해 재발명된다

막스 뮐러의 상실까지도 사랑

사랑은 존재의 결합과 세계의 창조


결론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를 껴안는 실천

사랑은 반복되고 재발명되어야 한다

사랑은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며, 세계를 함께 구축하는 과정이다


& 지금까지 내가 썼던 글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인 글을 두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이 글은 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처음에 이 글을 썼을 때는 독후감 정도의 분량이었고,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쓸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에리히 프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알게되고, 철학과 인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분량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그에따라 수정이 더해졌고, 이 책이 BTS가 선정한 세 권의 도서목록에 올라감에 따라, 다른 책에 대한 내용까지 더하게 되면서 분량이 점점 더 늘어갔다. 글이 완성되고 지인들에게 이 글을 보여주었을때, 차라리 원서가 더 쉽게 여겨진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내가 왜 이 '사랑'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것일까? 왜냐하면 아직도 사랑에 대해 잘모르기때문이다. 물론 나는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 본질적인 사랑에 대한 영역까지도 섭렵하고 싶다는 욕구가 상당하기도 했다.

나의 '리비도'는 성적인 것에만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가치를 통해 신 앞에 바로세움, '코람데오'에 이르는 길에까지를 다루고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제대로 파악하고, 완독했을때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론적으로 어느정도 정리되긴했었고, 그 사상의 흐름을 거슬러올라가면서, 플라톤부터 알랭바디우까지 각 학자들이 제기하는 사랑에 관한 정의를 섭렵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론적인 것에만 편향되지 않도록 생물학적, 신체적인 욕구까지 다루게되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사랑에 대한 정의와 인식은 뭔가 편향성이 짙다는 것이다. 플라톤이 사랑에 대해 '플라토닉'과 '에로스'로 구분짓지말고 전체제인 관점에서 그것을 조망해야하지만 시대는 자신들이 내세우는 기준으로 사랑을 도덕으로 만들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른 이들을 대상화하고 자신들은 이상화하면서 무분별적인 욕구를 채우고 있다. 사랑은 그런 기준이나 도덕이 아니라, 그것은 합리적 이성과 신앙을 전제로 하여, 인간을 다른 이들과 함께 자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쓴 글은 철저히 에리히 프롬의 생각의 결을 따라가고, 그것의 근거를 더해 총체적으로 다시 사랑을 재정의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의도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랑은 '자기애'로부터 시작되어야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자신을 잘 알아야한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할수 있는 존재가 다른 사람까지 사랑할수 있기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럴수 있는 것은 몸과 마음속에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혼재해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에로스'가 될수도 있고. '플라토닉'이 될수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에게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으로는 신과의 합일로 귀결된다. 아마도 이것이 프롬이 말한 사랑의 기술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은 끝없이 연마되고 계속되어야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은 머리로 이해하는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것은 공감에서 끝나는 것과 유사할뿐이다.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나는 사랑을 잘모른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 참고도서


<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문예출판사, 2019. 09. 11 >

1) 171P

2) 130P

3) 120P

4) 38P

5) 62P

6) 81P

7) 80P

8) 177p


사실상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궁극적이고 현실적인 욕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가 은폐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랑의 본성을 분석하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랑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밝혀내고 이렇나 결여 상태에 책임이 있는 사회적 조건을 비판하는 것이다. 개인의 예외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대한 통차찰을 바탕으로 하는 합리적 신앙이다. 8)



< 사랑은...... >


천국이나 지옥을 맛보는 것

아니면 그 사이의 어딘가


희생과 배려 또는 이기심과 욕망

아니면 그것들의 균형


친밀한 애착 또는 성적인 욕구

아니면 그것들의 조화


감정의 놀이 또는 인간관계의 기적

아니면 그것들의 결과


사랑은,

나만의 답을 찾는 여정 또는 함께하는 태도

아니면 그것들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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